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무아 Apr 02. 2024

힘든 일이 없었더라면 ᆢ

 걸어온 시간의 자취

 이번 부산 여행의 주요 동기는 동창의 개인 그림 전시회 축하 관람이었다. 사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교직에서 정년퇴직을 한 후 5년 간 수채화에 몰입한 친구가 나이 70에 그동안 자신이 맺어온 알찬 결실을 공개하는 의미 있는 행사였다.   

 부산시민회관

 2024년 3월 16일 12시


 부산시민회관. 공연 문화의 불모지였던 1973년에 문을 열었다. 검은 터틀넥 스웨터를 받쳐 입은 젊은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연주회가 우리를 설레게 했고 막 떠오르는 배우 강태기가 주연한 전위 연극, <에쿠우스> 공연이 혼을 빼앗아 갔던 곳이다.


 부산, 포항, 서울에서 모여 온 여섯 명이 함께했다. 공모전 수상작을 비롯하여 50호, 100호의 대작들 여러 점을 포함한 40여 점의 완성도 높은 그림이 넓은 전시장 네 벽면을 꽉 채우고 있었다. 전공을 한 것도 아닌데 5년여의 짧은 시간 안에 이리 큰 진전을 보인 것에 우리 모두 놀라워했다.

 언제나 어른스러웠던 그 친구가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내게 있어서 그림은 명상이야. 힘든 일이 없었으면 내가 저런 그림을 그렸겠니?"

 친구가 손으로 가리킨 그림은 100호짜리 2편의 연작이었다. 고요히 고여 있는 계곡물에 비친 하늘과 나뭇가지와 물든 단풍잎, 계곡물을 담고 있는 크고 작은 바위, 그 바위 위에, 바위 사이의 물 위에 떨어져 수북이 쌓인 단풍잎들이 실물처럼 담겨 있었다. 그 잔잔한 선과 면과 색들을 어찌 저리 섬세하게 표현하였는지. 깊은 호흡 속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혼자만의 세계에서 무엇인가에 몰입한 결과물일 것이다. 본인도 성실하게 직장 생활을 잘 마무리하고 이런 큰 전시회를 열었고 동료 교사였으며 옆에서 함께 인사를 나누는 남편분도 깔끔하고 단정하셨다. 아들 둘 모두 장성하여 독립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 친구에게 무엇이 그리 힘든 일이었을까? 지금 보이는 외면은 넉넉하고 안정된 분위기이다.

 그 옛날 단짝이 되어 온갖 얘기를 조잘대었듯이 언젠가 또 호젓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을 것이다. 50년 세월이 흐른 후에도 마치 어제 본 듯 이리 스스럼없이 반갑게 얼굴 마주했으니. 게다가 우리에게는 이제 앞서 나아가는 시간보다 뒤돌아보며 나를 만나는 시간이 어쩌면 더 의미 있고 아름다운 시간이 아닐까? 함께 점심을 먹고 편안하게 이야기들을 주고받은 후 친구는 전시장에 남고 우리 다섯은 모교로 향했다.


 50년 전의 모교는 이제 우리들의 추억 속에만 살아 있는 전설이 되어 버렸다. 전투복으로 무장하고 손에는 방패막과 곤봉을 든 전경들에 의해 꽉 막혀 있곤 했던 정문 앞. 우리들의 아지트였던 두 개의 다방, 마로니에와 에뜨랑제, 2층에 탁구장이 있었던 낮은 상가 건물, 18번 19번 두 번호의 버스 종점이었던 기름 냄새나던  공터, 튀김 고명을 얹은 굵은 가락국수가 참 맛있었던 허름한 식당. 모두 사라지고 대신 새로 생겨난 전철역부터 복잡하고 소란스러운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다.

 학교로 들어섰다. 턱없이 좁아져 버린 대운동장, 온갖 건물들로 가득 찬 교정에서 옛 낭만을 연상시키는 향기는 만나기 어려웠다.


 가장 높은 곳에 있었던 약학대, 가장 입구에 있었던 문리대 본관, 그 위의 법대, 길 건너편 공대, 박물관을 지나 호젓한 곳에 있었던 가정대, 중간 지점에 있었던 중앙 도서관, 교양과정부 수업이 이루어졌던 몇몇 가건물들, 모두 해서 겨우 열  정도가 아니었을까?

 2,3층 낮은 건물들 뒤로 금정산이 보이고 교정 안으로 계곡이 흐르고 학교 옆 철조망 밖, 넓은 시냇물 중간중간에 놓여 있는 커다란 바위를 성큼성큼 건너뛰면 하숙촌이 있었던 그곳. 시골에서 유학 온 선배들이 고향에서 보내온 학비를 향토 장학금이라는 명목으로 우리 철없는 후배들에게 한 턱 쏘던 시절.


 이제는 높이 솟은 건물들이 뒤에 우뚝 선 금정산을 가려 버리고 학교 안으로 셔틀버스가 드나들며 매캐한 매연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낭만보다는 피로감이 몰려왔다.

 주말이어서인가? 옆을 지나가는 청년들 네댓 명이 학교를 둘러보며 감회를 나누고 있었다. 명랑하고 활달한 한 친구가 말을 건넸다. 04학번이라고 한다. 73학번이라는 우리들 일행에게 갑자기 깍듯해졌고 우리는 주춤해졌다.


 언제 이렇게 부지런한 시간이 알뜰히도 우리를 앞서 갔을까?


작가의 이전글 2024년 3월 15일 금요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