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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Apr 18. 2024

라 칸티나

 한 사람이 빠진 자리

 칠순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아이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엄마, 뭐 갖고 싶으세요?"

 "엄마, 뭐 하고 싶으세요?"

 "글쎄~."

 딱히 떠올릴 만한 것이 없었다. 박완서 님 말씀처럼 이제 버리고 갈 것밖에 남지 않아 홀가분한 나이가 아닌가? 사고 싶은 물건도 하고 싶은 일도 별로 없었다.


 우연히 길을 가다 포스터 한 장이 눈에 띄었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2024 ㆍ1ㆍ 24 ~ 3ㆍ24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앗, 저것이다!

 가족방에 바로 톡을 넣었다. 같이 뮤지컬 공연을 보았으면 좋겠다고. 한 가지가 더 첨부되었다. 공연 후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고. 장소는 라 칸티나 이탈리안 레스토랑.


 일을 하면서 도우미 없이 두 아이들을 키우는 딸들에게는 시간 내는 일이 가장 어려운 것 같았다. 맞벌이로 아가 둘을 키우는 아들은 아예 조용했다. 한창 육아와 살림에 꽁꽁 묶여 있는 시기이다 보니 처음 반응은 난색 표명이었다.

 "엄마, 표를 두 장 끊어 드릴 테니까 절친이랑 가실래요?"

 한 장에 17만 원이 넘는 돈을 그렇게 쓰고 싶진 않다는 내 대답에 아이들은 바로 방향을 바꾸어 날짜를 기 시작했다. 서로 가능한 날을 올려가며 겨우 결정한 날짜는 마지막 공연을 하루 앞둔 3월 23일 토요일, 시간은 오후 2시.

 각자 배우자의 도움을 받아 아이들의 학원 등하원이나 식사 챙기기를 해결한 모양이다. 티켓 예매까지 후다닥 해치웠다. 손 빠른 둘째의 금손 활약이다. 셋이서 나란히 볼 자리는 이미 거의 다 판매되어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좋은 자리 셋을 골랐다고 알려 왔다. 나는 무조건 오케이다. 아주머니가 오시지 않는 주말에는 부부 둘이서 아가 둘을 보살펴야 하는 아들은 일찌감치 뮤지컬 관람은 포기하고 식사 시간에만 동참하겠다고 한다.

 뮤지컬 관람이 결정되자 미리 알고 가면 좋다고 자료들을 마구 올렸다. 스텝들의 이모저모, 감동적인 장면들, 역대 공연물 등이 소개되었다. 딸들이 더 좋아했다.


 일찍 만나 큰애가 강추하는 한식집 사발에서 깔끔한 점심 식사를 하고 지나가는 길 쇼윈도에 걸린 예쁜 봄옷도 가볍게 두 벌을 구입했다. 시간 맞추어 도착한 세종문화회관.

 뮤지컬 공연 관람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무대를 꽉 채운 프로들의 열기에 벅차오르는 감동과 절로 벌어지는 입과 터져 나오는 감탄사, 사진 촬영. 관람 후 주고받는 대화에 탄력이 넘쳤다.

 꽃샘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봄기운을 담은 가벼운 옷차림들이 활보하는 도심 한복판. 공기 속을 떠도는 청춘들의 활기에 몸과 맘을 내려놓고 차를 나누는 시간. 대화에 끼기도 하고 옆에서 가만히 듣기도 한다.


 어느덧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음식점에 도보로 도착하니 아들이 먼저 와 있다. 세 살짜리 손녀를 데리고 나오겠다고 했는데 홀몸이다. 장모님이 오셔서 편안하게 가족 모임에 다녀오라고 하셨단다.

 을지로에 위치한 라 칸티나.

 남편과 종종 들렀던 곳이다. 나와 둘이서 또는 가족 모두와 함께.

 예약 손님이어서일까? 조용한 방이 준비되어 있었다. 자리에 앉자 큰애가 식탁 위에 티슈를 올려놓는다.  

 "울게 될지도 몰라요."

 그리고 덧붙인다.

 "아빠, 우리가 힘들었던 이야기도 할 거예요. 하지만 90%는 감사하는 마음이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그 말에 빙긋이 웃었다. 100% 공감의 미소다. 티슈를 사용할 일은 끝까지 없었다. 시간이 흐른 것이다. 8개월.

 아이들은  터지듯 경제, 사회, 문화의 각 분야에 걸친 다양한 정보와 살아가는 일상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고유명사들도 많았지만 자식들 입에 들어가는 음식만큼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도 예뻤다. 옛날 남편이랑 함께 온 가족이 여기서 몇 번 식사를 즐겼억도 화제에 올랐다.


 메뉴를 선택하는 것은 아이들 몫이다. 머리를 맞대고 네 가지를 골랐다.

 이곳의 점잖고 조용한 분위기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날렵한 꽃미남이 아닌 중후한 노신사풍의 종업원들이 검정 정장을 갖춰 입고 왼팔에는 정갈하게 다린 하얀 수건을 늘어뜨리고 예의 바르게 응대한다. 격조 높은 품위도 여전하다.

 식사가 끝날 무렵 한 가지 음식을 더 추가했다. 가장 양이 아쉽게 여겨진 봉골레를 주문하자 종업원이 바로 의견을 내었다. 아까는 국물이 있는 요리였는데 이번에는 국물이 없는 봉골레로 준비해 드리겠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는 무조건 좋다고 했다. 그리고 조금 감동했다. 테이블이 꽤 많은 식당인데 어떻게 우리가 시킨 요리를 다 기억하고 또 이렇게 적절한 조언까지 해 줄까? 잠시 후 나온 볶음 봉골레도 고소하니 맛있었다. 아이들 셋은 쉼 없이 대화를 나누고 식탁 위의 접시들은 깨끗하게 비어 갔다. 계산서를 보니 그리 높지 않은 금액이었다. 아들이 말했다.

 "포도주도 한 병 시킬 걸 그랬어요."

 남편이 있었으면 결코 빠지지 않는 메뉴인데ᆢ.

 

 어두워진 도심은 어느덧 불빛으로 가득했다. 각자의 집을 향해 가장 좋은 교통편을 골라 귀갓길에 오르며 오늘 하루 일정이 끝났다.

 5년 후, 10년 후 언젠가 또 이날을 기억하며 따뜻한 미소를 피워 올릴 것이다. 내 마음에 쏙 드는 칠순 선물이다.

 이튿날에는 아치핏이라는 로고가 달린 운동화가 택배로 왔다. 연분홍, 연보라, 검정. 색깔도 다르고 디자인도 조금씩 다른 기능성 운동화가 세 켤레나 생겼다. 운동화 부자가 되었다. 족저근막염을 고려한 큰딸의 특별 선물이다

 식사 후 아들이 슬며시 건네준 두툼한 봉투와 모두의 존중해 주는 마음. 무엇보다 귀한 시간을 함께 해 준 것이 가장 고맙다.

 언제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나를 생각해 주는 아이들에게 변함없는 주님 은총이  함께 하길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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