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에서의 둘째 날은 일찌감치 하루를 열었다. 5시 40분, 숙소로 내려온 S 씨는 우리들을 태우고 새벽길을 달렸다. 7시 20분에 출발하는 장고도행 배를 탈 것이다. 섬 트레커 브런치 작가님의 글을 읽고 정한 여정이다.
6시 5분 대천여객선 터미널에 도착했다. 7시 20분 승선하여 8시 30분 장고도 대멀선착장에 내렸다. 몇몇내린 듯한 손님들은어느새 총총걸음으로 모두 제 갈 길로 멀어져 버리고 선착장에는 우리 넷만 덩그러니 남았다. 주위를 살펴보다 장고도어촌체험 안내 입간판에 적혀 있는 번호로 먼저 전화를 넣었다. 바로 전화를 받으신 이장님이 마을로 들어오는 길을 알려 주셨다.
그다지 높지 않은 산속 오솔길, 사람들이 다니는 곳임을 알려주는 나무 계단을 올랐다. 인적 없는 낯선 곳이지만 소박한 작은 섬이 정겨워여유롭게 산길을 걸었다. 마악 내리기 시작한 보슬비로 초록이 무성한 나뭇잎과 흙들이 한결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각기 다양한 우산을 들고 호젓한 산길을 드텨 내려가는 친구들의 뒷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언덕 같은 산 하나를 넘어 평지에 도착하자 친절하신 이장님이 반갑게 맞아 주셨다. 그 시간에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은 한 군데밖에 없다며 승용차로 식당까지 태워다 주셨다.
무뚝뚝한 두 여자분이 무표정하게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메뉴를 묻는 우리에게 음식은 당신들이 준비하는 것한 가지밖에 없다고 했다. 바닷가의 별미를 기대했지만 무던한 우리 할머니 넷은 무조건 오케이.
"네, 알았어요."
밥과 찌개와 밑반찬이 있는 평범한 밥상을 맛있게 먹었다.
밖으로 나오니 비는 개이고 햇빛이 짱짱하다. 텅 빈 마을길을 걷다 보니 남자 두 분이 그물을 펼쳐 널고 있다. 선착장 가는 길을 묻자 가까이 있던 젊은이는 생글생글 웃기만 한다. 외국인 근로자였다. 저쪽에서 같이 일을 하시던 분이 대신 대답해 주신다. 이 길을 따라 쭈욱 돌아가라고. 신발이 불편한 E와 H가 조금 난감해하자 그분이 금세 옆에 세워 둔 자기 트럭 운전석에오르며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E와 H는 트럭에 올랐다. S 씨와 나는 바닷가를 걸었다.
가만히 바닷물을 바라보고 있자니 점점 물이 빠지고 있었다. 썰물 때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바로 건너편에 보이는 섬이 명장도다. 이곳 장고도와 명장도 사이를 잇는 갯벌길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거리다. 발을 적시지 않고 한 발 한 발 명장도로 향한 길을 나아갔다. 물이 빠지는 속도가 꽤 빨랐다. 금세 길이 이어졌지만 우리는 '여기까지'라며 발길을 돌렸다. 1시에 대천으로 출발하는 귀환선을 타야 한다. 길이 뚫리는 것을 본 것만으로 족하다.
동네 길을 빙 돌아 선착장에 도착했다. 아직 시간이 넉넉하다. E와 H는 지붕이 그늘을 만들어 주는 동네 정자 마루 위에 온몸을 부리고 누워 있었다. 세상 편한 모습이다. S 씨와 나는 선착장 옆 그리 넓지 않은 모래 해변을 맨발로 걸었다. E와 H도 합세했다. 둘의 표정이 맑다. 정자에 편하게 드러누워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바람과 하늘과 파도 소리를 마음껏 즐긴 시간, 진정한 힐링의 시간이 정말 좋았다고 했다. 섬을 독차지한 듯 마음껏 누린 고요와 평화는 오랜만의 귀한 선물이었다.
네댓 시간 머무르는 동안 섬에서 만난 사람은 딱 다섯 명이었다. 이장님, 식당 아주머니 두 분, 트럭을 제공해 주신 아저씨와 외국인 노동자.
사람 속에 파묻혀 지내는 도시 생활의 번잡함에서 놓여나 온전히 자연 속에 머물렀던 시간, 고요했던 그 분위기가 장고도의 추억으로 고스란히 간직되었다.
배에서 내려 대천항 어시장을 구경했다. 말린 조기 무더기를 택배로 구입했다. 마침 추석이 코앞이라 삼만 원어치를 사면 만 원 짜리온누리 상품권을 돌려받는 혜택을 누렸다.
맛집 바다탕집에서 점심을 먹고 S 씨가 휘익 승용차를 몰아간 곳은 보령 해저터널. 천정과 벽을 현란하게 수놓는 디지털 영상 속을 뚫고 터널을 빠져나온 곳은 원산도. 다시 안면대교를 달려 안면도 영목항 전망대 앞에 도착했다.
2023년 6월에 완성하여 아직은 준공기념 무료탑승 중이라는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탔다. 순식간에 22층 전망대에 올랐다. 충남 최남단이라고 한다.
전면 유리창 밖, 사방으로 펼쳐지는 바다와 멀고 가까운 섬들, 한결같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물과 뭍, 긴 시간 많은 사람들이 거쳐 갔거나 머물러 있는 일터와 보금자리.
그 품에서 생로병사를 겪으며 희로애락을 엮어간 한 명 한 명, 숱한 사람들.
그들이 남겨 놓은 진한 이야기와 깊은 사연들이 창 밖, 멀고 넓은 풍경 속에 조용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