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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Nov 07. 2024

아무도 잠 못 이루리

사랑하면 용감하다

 2024년 10월 19일 토요일, 저녁 7시, 잠실체조경기장, 투란도트.


 오전 11시 30분, 카톡 한 통이 날아왔다.

 ㅡ 오늘 저녁 7시, 마지막 공연, 오페라 투란도트. 보고 싶으면 티켓 구해줄게. 어제 봤는데 너무 좋더라 ㅡ

 전혀 예상치 못했던 굿뉴스. 당장 같이 갈 사람부터 물색했다. 친구 E와의 동행이 결정되었다.

 ㅡ 6시 반, 올림픽공원역 4번 출구에서 만나자 ㅡ


 1-1 입구에서 티켓을 수령하라는 문자가 온 것은 4시 46분. 집이 조금 먼 E는 바로 출발하겠다고 했다.

 1-1 입구는 초대권 입장 구역이었다. 두 장의 표에 매겨져 있는 어마어마한 금액에 E와 나는 입이 딱 벌어졌다. 상상을 초월한 숫자였다.

 좌석은 무대 바로 앞, 넓은 바닥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임시의자였다. 난생처음 경험하는 특별석. 1시간 반에 걸친 명품 오페라 공연을 바로 코 앞 정면에서 편안하게 감상하는 호사를 누렸다.


 선대 공주가 폭도들에게 숨진 것에 대한 깊은 원한으로 남자들에게 철저한 복수를 꿈꾸는 절대 권력의 소유자, 중국 공주 투란도트.

 자금성 위에 나타난 공주의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해 버린, 패망한 타타르 왕국의 왕자 칼라프.

 언젠가 단 한 번 자신을 향해 환한 웃음을 보여주었다는 이유 하나로 가슴 깊이 칼라프 왕자를 사모하고 추앙하는 타타르 왕국 여자노예 류.

 이 세 주인공들이 연인을 향한 자신의 깊은 사랑을 표현하는 주요 무기는 모두 '용감함'이다.


 공주가 내놓은 세 가지 문제를 다 맞혀 결혼할 자격을 얻은 칼라프 왕자. 어느 남자도 결코 나를 가질 수 없다며 공인으로서의 공개적인 약속까지도 지키길 거부하는 공주. 그녀는 수십 년 온몸을 차갑게 가려온 두꺼운 베일을 용감하게 벗어 버리고 사실은 처음부터 칼리프 왕자를 사랑하였노라고 고백한다. 연인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류의 희생과 헌신에서 진정한 사랑이 지닌 힘을 목격한 때문이다.


  여자노예 류는 왕자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냉혹한 공주에게 잡혀와 왕자의 이름을 밝히라는 심문 앞에 자결을 택한다. 그녀는 이승에서의 마지막 애절한 노래를 부른다.

 ㅡ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려 나는 죽어요.ㅡ


 또 한 사람, 칼라프 왕자는 게임에서는 이겼지만 공주의 진정한 사랑을 얻기 위해  목숨을 내건다.

 ㅡ해가 뜨기 전까지 내 이름을 알아내면 당신 뜻대로 하시오.ㅡ

 그 밤, 장엄하고 유려한 테너의 아리아가 울려 퍼진다.

 ㅡ 아무도 잠 못 이루리. 내 이름을 알아맞히기 위해 아무도 잠 못 이루리. 공주도 잠 못 이루고 ㅡ

 목숨까지 내놓고 사랑을 구하는 그는 더욱 소리 높여 노래한다. 테너음의 절정이다.

 ㅡ 결국 공주가 날 사랑하게 만들리라. 난 이길 것이다. 새벽이 밝아오면 이기리라, 이기리라. ㅡ


 드디어 새 날이 열리고 많은 이들이 숨죽여 지켜보는 광장에서 공주가 소리 높여 외친다.

 "그의 이름을 알아냈어요."

 온 극장 안은 긴장으로 얼어붙는다. 왕자 칼라프, 그이마저 서슬 퍼런 칼날 아래 스러지고 마는가?

 순간,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바로 이어지는 대사.

  "그의 이름은 '사랑'."


 갑자기 바뀌는 극적인 변화. 꽁꽁 얼어붙었던 공간은 온통 축하의 춤과 사랑의 노래로 뒤덮인다. 한 점 티끌 없이 활짝 피어나는 왕자와 공주의 행복한 웃음.

 류의 슬픈 죽음은 까맣게 저 뒤로 잊혀져 버렸다.


 아주 오래전, 수십 년 전, 세종문화회관에서 교우 Y 씨랑 함께 관람했던 투란도트. 그때 그 시간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성당 구역일을 같이 맡아 함께 호흡이 잘 맞았던 Y 씨. 너무나 성실하고 순수하게 자기 길을 잘 걸어온 사람이다. 남편이 건네준 초대권으로 정장 차려입고 함께 시내 광화문으로 나갔던 젊은 시절의 우리들. 이사로 헤어진 지 수십 년이 흘렀다. 몇 년 전까지도 종종 안부가 오고 갔건만 함안살이 2년을 계기로 소원해졌다. 시골 내려가면 입으라고 Y 씨가 사 준 회색 사선무늬 고급 바람막이 윗옷은 아직 새것으로 옷걸이에 걸려 있다. 이제는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고 있으니 조만간 연락을 해 봐야겠다. 늦기 전에 ᆢ.

 그 무렵 6개월 간 함께 교리 공부하며 같이 세례 받았던 S 씨도 생각난다.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깜짝들 놀라겠지. 그렇게 똑 떨어지던 사람이ᆢ.

 눈시울 적시지 않고 그 소식을 전할 수 있을까?

 언제 이렇게 세월이 흘렀을까?

 사랑 앞에서 용감하지 못했던 내 모습을 뒤돌아본다.



* 공주가 내 건 세 가지 철학적 질문

1. 밤마다 피어오르지만 아침이 되면 사라진다

 ㅡ희망

 2. 불처럼 뜨겁지만 불은 아니다. 죽으면 차가워지고 정복을 꿈꾸면 타오른다

 ㅡ 피

 3.자유를 바라면 노예가 되고 노예가 되기를 원하면 왕이 된다

 ㅡ투란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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