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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Nov 21. 2024

두 장의 사진

  가족

 2024년 11월 14일, 목요일.

드디어 첫 테이프를 끊었다. 여섯 손주 중 제일 맏이인 외손녀 J가 2025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는 날이다.

 아침 7시 30분, 가족 카톡방에 큰딸이 소식을 알려 왔다.

 ㅡJ, 고사장에 잘 들어갔습니다.ㅡ

 사진 한 장도 함께 올라왔다. 딸이 동그라미 쳐서 표시해 준 키 큰 손녀의 뒷모습이 의젓하고 대견하다. 온 가족들이 얼마나 노심초사하는 긴 시간의 터널을 지나왔을까. 사진 속 손녀의 침착해 보이는 분위기에 내 마음도 편안하다. 고맙다.


 사흘 전 저녁 무렵, 잠깐 들러 얼굴을 보고 왔다. 책상 하나 가득 책들을 쌓아 놓고 열심히 공부에 몰두하고 있었다. 밝게 웃으며 반갑게 인사하는 얼굴 아래 발갛게 올라와 있는 목덜미의 아토피 열이 유난히 눈에 띈다.

 '아, 우리 J가 고생이 많구나.'

 못 본 척 짠한 마음을 누르고 따뜻한 포옹을 했다.


 수능날에는 같이 기도하자는 둘째의 고마운 제의로 둘째네 집 가까운 성당에서 함께 오전 10시 미사를 봉헌했다. 성모상 앞에 촛불 다섯 개를 밝혔다. 남편을 위해서, 세 아이들 가정의 두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받지 못하는 다른 수험생들을 위해서.

 누군가의 기도를 받는 것은 은총이며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축복이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구엔 반 투안 주교님의 말씀을 떠올린다.

 ㅡ 나는 기다리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사랑으로 채울 뿐입니다.ㅡ  

 베트남 전쟁이 끝난 후 반혁명죄로 투옥되어 14년 간 대부분 독방에서 수감생활을 보낸 구엔 반 티안 신부님. 자신을 박해한 사람들에 대한 용서와 사랑을 적어 남긴 옥중 묵상집 <지금 이 순간을 살며>에 적혀 있는 한 구절이다.  

 그래, 지금 이 순간을 사랑으로 채울 뿐이다. 하늘이 보이면 하늘을 사랑하고 나무가 보이면 나무를 사랑하고 코끝에 와닿는 서늘한 공기를 사랑하면 되는 것이다.

 지금 마주하고 있는 이를 사랑하고, 음식을 차려 대접할 이를 사랑하고, 기도해야 할 사람들을 사랑하면 되는 것이다.


 수능 다음날 큰딸은 가족방에 글을 올렸다.

 ㅡ오늘 아침에는 새벽 미사에 가서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J가 큰 실수를 안 해서 논술시험 볼 자격이 주어진 것 같아서 너무나 다행입니다.

 기도를 드리는 중 아빠께서도 J를 도와주고 계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요. 아빠 생각을 한참 하면서 감사를 전하고 왔습니다.ㅡ

 내가 답했다.

 ㅡ맞아. 너희들 셋, 입시 기간 동안 꼬깃꼬깃 낡아진, 수험생을 위한 기도문을 일 년 내내 양복 윗도리 속주머니에 넣어 다니셨으니 J의 입시를 따뜻하게 지켜주셨을 거야. 새벽 미사 봉헌, 수고 많았어.ㅡ


 논술고사는 수능 한 달 전부터 시작되었다. 첫 논술고사를 치르는 J와 같은 시간에 J를 생각하며 쓴 브런치 글, <내디딘 첫발>을 바로 그날 저녁 J와 공유했다. J가 답글을 보내왔다.

 ㅡ저 잘 치르고 왔어요!!! 답안도 공부했던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서 큰 문제없이 두 문제 다 꽉꽉 채워 제출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글 잘 읽었어요. 감사합니다. 수능 끝나고 뵐게요.ㅡ

 11월 2일, 위령의 날에도 안부를 전해 왔다.

 ㅡ방금 외할아버지를 위해 잠깐이나마 위령기도 드렸습니다. 저는 주어진 시험 마지막까지 잘 마무리할 테니까 할머니도 추워지는 날씨에 건강 조심하시고 내일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항상 감사합니다.ㅡ


 수능은 끝났고 뒤이어 다섯 대학의 논술고사 강행군이 이어진다. 지난 주말인 토요일, 일요일은 이틀에 걸쳐 세 군데의 대학에서 논술고사를 치렀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두 시간씩 몰두해야 하는 고도의 정신노동. 성심껏 임하는 의젓한 열여덟 살이 고마울 뿐이다.

 기온이 많이 내려간 일요일 저녁, 벌써 어둑어둑해진 5시 40분. 큰애가 소식을 올렸다. 그날은 두 시간씩 두 군데 대학에서 논술고사를 본 날이다.

 ㅡ 무사히 마치고 이제 돌아갑니다.ㅡ

 사진 한 장도 올라왔다. 50대에 접어든 네 가족의 가장, 젊지도 늙지도 않은 아버지가 종일 힘든 시험을 치르고 나온 어린 딸의 어깨를 폭 감싸 안았다. 충성을 맹세한 보디가드인 양 귀한 공주님을 모셔가고 있다. 무거운 가방도 당연히 아빠 등으로 옮겨가 있다.

 사진 속에는 없지만 사진사를 맡은 큰애의 감사하는 마음도 읽힌다. 무거운 짐을 끝까지 잘 지고 온 어린 딸에 대한 고마움, 물심양면으로 묵묵히 가장의 자리를 잘 지켜 온, 어느덧 50이 넘은 남편에 대한 고마움이다.


 이 날 밤, 손녀도 한 줄 소식을 남겼다.

 ㅡ이제 E대랑 H대 남았어요. 곧 입시도 끝이네요. 하하. 최상의 컨디션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ㅡ


 靜中動의 묵직한 파도를 타고 2024년 11월이 조용조용 꼬리를 감추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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