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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어느새

by 서무아

새벽녘.

쏴아 쏴아, 어스름한 창밖으로 제법 세찬 가을비 소리가 스산하다. 휙 스쳐가는 생각 한 가닥.

'아, 찬스, 옥상 바닥 청소를 해야겠다.'

온전히 어둠이 물러가기를 기다려 밀대와 손걸레를 챙겨 들었다. 옥탑방에 걸려 있는 비닐 비옷을 갖춰 입고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썼다.

이른 아침.

사방이 툭 트인, 시원한 옥상의 촉촉한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열리는 문을 향해 밀려온다. 다행히 폭우는 아니다.

방수 처리된 초록빛 옥상 바닥.

넓고 높은 창공에서 떨어지는 투명한 빗방울들이 통통 물방울들을 튕기며 크고 작은 동심원들을 그려낸다. 빗물들의 화려한 윤무 같다. 천상의 것이 지상의 것과 만나서 서로에게 건네는 인사의 손길, 서로를 껴안는 정다운 악수.

춥지도 덥지도 않은 서늘함 속에서 잠시 모든 생각들을 내려놓고 한가로이 빗방울들의 경쾌한 춤을 바라본다. 한없이 가볍고 정답다. 뜨거웠던 여름의 힘들었던 땀 끝에 누리는 호사다.


옥상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옥탑방 지붕에서 내려오는 낙숫물 양도 제법이다. 시원스레 쏟아지는 두 군데 홈통 아래에 큰 대야를 밀어 넣는다. 금세 맑은 물이 찰랑찰랑 채워지더니 넘쳐흐른다.


이젠 꽃보다 씨앗이 더 많이 달려 있어 줄기가 축 늘어진 채송화 무더기를 걷어낸다. 여름 내내 앙증맞은 빨간 색 고운 얼굴로 나를 반겨 주었던 예쁜 꽃, 어린 시절 우리집 꽃밭을 기억나게 해 주는 아련한 추억 속의 꽃이다. 그 시절 그 마당을 밟던 많은 얼굴들을 떠올려 주는 꽃. 채송화.

풍성하고 탐스럽게 예쁜 열매들을 맺어 볼 때마다 신기하던 방울토마토 세 그루. 이제는 때늦은 노란 별꽃들만 소담스레 달고 있는 늙은 가지와 땅 속 깊이 뻗은 긴 뿌리를 뽑아낸다. 잎이 다 말라버린 가지들을 잘라 커다란 화분 속에 차곡차곡 눌러 담는다. 퇴비를 만들 생각이다. 굵은 가지와 단단한 뿌리들은 쓰레기봉투에 옮겨 담는다. 빈 화분들을 정리하고 한 곳으로 옮겨 둔다.


내리는 빗속에서 밀대로 바닥을 미는 순간, 옥상 바닥은 먼지 한 톨 없는 초록빛 말간 얼굴이 된다.

여름내 폭양 아래서 온몸으로 버텨온 피로를 말끔히 씻어내었다.

구석구석 마무리 작업 뒤에도 계속 쏟아지는 가을비가 또 한 번 깨끗하게 대청소의 뒷마무리를 한다. 상큼한 새 단장이 끝났다.


비옷 안은 어느새 땀으로 촉촉하다. 서늘한 바람이 금세 열기를 앗아간다. 깨끗해진 옥상 구석구석을 몇 번이고 거듭 훑어본다. 빗속에 우뚝 서서 아직 꽤 많은 가지를 달고 있는 가지나무와 화려한 보라색 꽃을 우아하게 하늘을 향해 뻗어 올리고 섰는 방아, 초록을 잃지 않고 계속 느린 성장을 이어가고 있는 깻잎대와 바질. 텃밭 내용물들이 많이 훌빈해졌다.


머잖아 이곳 작은 옥상에도 찬바람이 불고 첫서리가 내릴 것이다. 모든 생명이 얼어붙고 얼음이 얼고 눈이 쌓이겠지.

그때에 꼭 기억하리라. 오늘의 이 맑은 빗방울들과 고즈넉한 가을비의 정다움을, 한여름 땡볕 아래에서의 강렬한 생명력을, 봄의 여리고 다정한 새싹들의 희망을 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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