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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Apec, 백남준, 보아포

통합과 번영

by 서무아

순간적인 의기투합으로 이루어진 여고 동창 넷의 경주 여행. 그 목적은 딱 하나였다. 가나의 젊은 흑인화가, 아모아코 보아포의 전시회 관람.

두 시간 남짓의 기차 여행을 거쳐 도착한 경주. 힐튼 경주 부지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우양 미술관. 잘 가꾸어진 자연과 아름다운 건축물은 촉촉히 내리는 가을비에 젖어 더욱 선명하고 깔끔했다.


이제는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 버린 대우그룹(1967~2000)의 수장이셨던 고 김우중(1936~2019) 회장은 힐튼 경주의 건설과 운영에 깊은 관심을 쏟았다. 그 부지 안에 부인 정희자 님은 유학 중 사고로 세상을 떠난 장남 김선재를 추모하기 위해 자신의 개인 소장품을 바탕으로 1991년 5월 18일 국내 최초의 사립 현대미술관인 선재미술관 문을 열었다.


2012년 부산의 중견 기업 우양수산이 인수하여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거쳐 우양미술관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재개관하였다. 힐튼 경주와 우양미술관은 하나의 부지 안에 함께 위치한 복합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하였다.


미술관으로 향하는 길과 미술관 입구에 적혀 있는 전시회의 푯말 <I have been here before>, 전시관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백남준(1932~2006)의 비디오 아트 작품들의 주제인 <Future lies ahead>, 2025년 경주 APEC 정상회의의 주제인 <연결, 혁신, 번영>은 묘하게 하나의 목표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1991년 신라 천년고도 경주에 국내 최초 사립 현대미술관이 세워진 것을 기념하여 제작한 백남준의 대표작 <고대기마인상>은 옛것과 새로움의 조화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정보의 속도를 몽골 기마 문화에 비유하여 가장 빠른 통신망과 정보 전달력이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세상, 기술이 만드는 세상을 예견한 것이다.


거인 백남준보다 50년, 반 세기 뒤에 아프리카 가나에서 출생한 젊은 보아포(1984년~ )는 인종차별 경험을 녹여낸 흑인의 정체성과 그들의 다양성을 깊은 시선과 강렬한 개성을 지닌 인물 초상으로 그려내어 같은 공간에서 전시를 하고 있다. 보아포는 붓 대신 손가락을 활용하는 핑거 페인팅 기법으로 독창적인 화법을 구현했다.


그들만의 예술혼을 불태운 독창적인 예술 작품으로 우리들을 맞이하는 두 예술가와 세계 경제 현황과 미래 전략을 집중 논의하겠다는 아시아 태평양 국가의 정상들, 그들 모두가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주도성이다. 인간이 중심이 되는 세상이다.


거의 초상화로만, 흑인들의 초상화로만 이루어진 아모아코 보아포의 전시회. 그 속에는 본인의 초상화도 있다.

청춘, 중년, 노년으로 보이는 각각의 여성 초상화들 앞에서 그들의 깊고 간절한 눈과 눈을 맞추며 나는 그 시절 무슨 생각으로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지를 떠올려 보았다. 정해진 일상의 틈바구니에서 주어진 역할 수행에 급급했을 뿐 나를 들여다보고 내면을 성찰하는 그윽한 눈, 삶에 대한 짙은 사색에 빠진 깊은 눈은 지니지 못했던 것 같다.

이제 겨우 40의 문턱에 들어선 보아포는 혁명적인 흑인 초상화로 흑인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세계 미술계에 확산시킨 공로자가 되었다.


전시회 마지막 부분에 비춰지고 있는 그의 인터뷰 영상은 그가 얼마나 진지하게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모색하고 키워 왔는지를 말해 준다. 그림에 못지않게 인터뷰 내용에서도 깊은 감동을 받았다.


ㅡ그림을 그리는 일이 정말 즐겁고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그림으로 인정받는 것이 행복하다. 머릿속에 꽉 찬 이미지들을 한 폭의 그림에 다 쏟아내고 나면 그 빈 공간에 다시 새로운 작품의 이미지들을 쌓아 간다.ㅡ


나에게 있어 글쓰기도 그러하다. 내 속에 가득 차 있는 생각과 감정들을 한 편의 글로 남기고 나면 그것들이 다 떠나간 자리에 또 다시 다른 생각과 감정을 쌓아 간다.

그 과정에서 주위의 많은 사물과 사건들이 단순하게 내 옆을 스쳐 지나가고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가지고 나와 인연을 맺는다. 그 인연에서 읽어낸 마음들을 한 편의 글로 정리하여 남기는 일, 이 일은 내 일상에 활력과 기쁨을 주는 귀한 선물이다.


그가 고백한 창작의 보람과 즐거움에 깊이 공감하며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야심차게 준비하고 계획한 운양미술관의 보아포 경주 전시회 관람을 기록으로 남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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