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마음 한 구석에 살아 숨 쉬고 있는 곳.
경주까지 왔으니 다음 행선지는 부산이다. 우리들이 태어나고 자란 곳, 부모님과 형제들이 함께 모여 살던 곳, 모교가 있는 곳, 부산.
예약해 둔 기차표로 부산역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0시 30분. 승용차나 항공이 아닌 기차 편으로 부산 내려오는 일이 거의 없는 친구들은 부산항의 변모에 깜짝 놀랐다. 우리들 기억 속의 부산역은 역사에서 빠져나와 광장을 지나 버스나 전철이 다니는 차도로 나오는 한 방향의 출구뿐이었다. 지금은 반대편으로 뻥 뚫린 통로로도 시야 가득 푸른 바다가 들어온다.
바다 건너 영도가 송두리째 보이고 눈 아래에는 녹색의 수변공원이 펼쳐져 있다. 2032년 올림픽 유치 실패로 건설 도중 하차한 거대한 오페라 하우스는 2026년 하반기에 완공될 계획이라고 한다. 다시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2028년 부산, 울산, 경남 올림픽 공동 유치에 성공하면 부산 북항은 훨씬 더 아름다운 항구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태화고무, 삼화고무, 조광페인트, 경남방직 등 24시간 3교대제로 활발히 조업했던 제조업들이 중국, 베트남 등 개발도상국으로 옮겨가고 22개의 계열사를 두고 재계 7위까지 올랐던 국제그룹도 정치적 부침에 따라 해체되었다.
일자리가 없어지자 경제 침체기에 접어든 부산, 일명 '노인과 바다'로 불린다는 부산이 바다라는 관광 인프라를 활용하여 국제적인 관광도시로 새롭게 태어날 날을 기대한다.
역 광장 왼쪽 편에 시티투어 버스 정류장이 있다.
해운대에서 송정해수욕장과 용궁사, 기장 시장까지 운행하는 블루라인, 감천문화마을, 다대포해수욕장, 국제시장, 용두산 공원 등을 운행하는 오렌지 라인, 영도 흰여울 문화마을, 오륙도 스카이워크, 태종대, 송도해수욕장 등을 순환하는 그린 라인의 세 노선이 있다.
우리는 그린 라인을 선택했다. 영도는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오는 코스지만 나에게는 항상 각별한 곳이다. 첫 발령지였던 남여자중학교가 있는 곳, 그래서 첫 신혼살림을 차린 곳, 그리고 남편이 졸업한 해양대학이 있는 곳이다. 도로 표지판에 적혀 있는 익숙한 지명들이 마음속 깊이 작은 통증의 파문들을 일으킨다.
첫 정류장인 영도 흰여울 문화마을. 그때는 바닷물과 자갈밭 외에는 아무것도 없고 인적도 드문 외진 곳이었다. 신혼 시절, 주 6일 근무제였던 그때 일요일, 점심밥을 먹고 설거지까지 끝낸 오후 한나절, 남편의 손을 꼬옥 잡고 꼬불꼬불한 해안 비탈길을 따라 내려가 산책을 즐겼던 영선동 절영해안 산책로.
가슴 한편에 서늘하게 자리 잡은 푸르런 추억들이 무성영화의 한 장면이 되어 슬며시 마음을 적셔 온다. 어느덧 4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같이 걸을 수 없는 이 길을 칠순을 넘긴 친구들과 함께 걷고 있다. 아련히 고개를 드는 그리움을 무심한 듯 꾹꾹 눌러 내리며 이색적인 분위기로 화려하게 치장한 흰여울 문화마을을 걸었다. 아이스크림도 먹고 하하 호호 사진도 남겼다.
자살바위로 유명했던 태종대, 어지간히도 걸어 다녔던 해안 산책길을 잠깐 들어가 보고 송도행 버스에 올랐다.
학창 시절 미술 사생대회를 나왔던 송도, 자리 잡고 앉아 스케치북을 펼쳤던 거무튀튀한 바위들만 기억나는 송도가 바닷물 위로 길게 놓인 데크길과 하늘을 가로지르는 해상 케이블카로 울긋불긋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와아 하는 탄성과 우와 하는 웃음으로 하루가 채워졌다.
숙소가 있는 해운대, 그곳에서 부산 친구 D와 식사를 같이 할 약속이 잡혀 있었다. 1년 전 만났을 때 같이 갔던 달맞이길 위의 이색적인 식당, '달맞이 체코 빵'이 오늘의 약속 장소다. 70대의 두 자매가 운영한다. 다리가 살짝 불편한 동생분의 분위기는 늘 쾌청한 하늘의 빛나는 태양 같다.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피아노를 전공했다는 그녀는 짬짬이 애교 섞인 말솜씨로 우리를 웃기고 후딱 주문한 요리들을 만들어 낸다. 식사 중에는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다는 클라리넷 연주를 들려주었다. 작년 이맘때는 가톨릭성가 두 곡을 들려주더니 오늘은 가곡을 준비했다.
바우고개 언덕을 홀로 넘으면~~
식사를 하던 우리도 조그만 허밍 소리로 따라 불렀다. 능숙한 연주는 아닌지라 두 곡 이상한 연주하지 않는 센스도 있다. 빠른 솜씨로 후딱 차려준 식탁 위를 세심하게 보살피며 더운물을 채워주고 두 가지 향기로운 꽃차까지 후식으로 우려내 주었다.
'사비수'라며 내놓는 체코빵은 인도 커리에 곁들여 나오는 난과 비슷한 담백한 맛이다. 나는 다시 낯선 빵 이름을 확인해 물어보았다. 그녀는 다시 '사비수'라고 말했고 친구들은 모두 웃었다. 서비스, 덤으로 더 준다는 빵이란다.
만날 때마다 초긍정의 말로 상대를 배려해 주는 D와 근황과 마음을 나누었다. 미리 구입해 놓은 빵 봉투를 야식 선물로 안겨 준다.
해운대 달맞이길 위의 독특한 식당. 이번 여행의 또 하나의 명물로 기억될 것이다. 귀여운 부산 할매 두 분의 잔상과 함께.
경주에서 만난 찻집, '비비비당'도 오래 마음에 간직하고 싶다. 우양미술관을 나오면 바로 눈앞에 나타나는 묵직하고도 우아한 카페, '비비비당'. 독특한 이름이다.
카운트를 지키고 있던 세 분, 남자 한 분과 여자 두 분. 동종업소에서 처음 경험하는 품위와 친절이 그들의 깔끔한 정장 차림, 따뜻하고 깊은 목소리, 우아한 매너에서 향기롭게 배어 나왔다. 조금은 이색적인 이름과 분위기에 이것저것 질문하는 우리들을 대하는 친절하고 우아한 태도가 참으로 아름다웠다.
옆에 놓여 있는 2025년 8월 1일~7일, 경주신문 특집 20페이지를 챙겨 왔다. 불교 경전에 나오는 非想非非想天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번뇌를 거의 다 끊고 생각이 없는 상태, 非想. 완전히 무념무상 상태는 아닌 곳, 즉 깨달음에 이르기 전의 깊은 명상 단계를 지칭한다는 非非想.
최고급 우전녹차와 정성스레 만든 다식, 전통 양갱을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700년 전 선조들이 사용하던 다기에 직접 담아서 내놓는다. 느림의 미학, 한국 전통 차실의 품격을 보여 주겠다는 비비비당에서 우리들은 커피를 주문했다. 다기에 담겨 나온 이색적인 커피, 정말 맛있다는 감탄을 하느라 바빴다. 앉은 곳에서 바라보게 된 출입구 쪽의 하얀 벽면은 흐린 날씨에 젖어 마치 바다로, 피안의 세계로 나아가는 하늘길 같았다. 흐린 날 지중해변의 산토리니 해안에 앉아 있는 듯했다.
경주 비비비당은 2호이며 1호는 바로 이곳 해운대 달맞이길에 있다고 들었다. 한번 꼭 가 보자고 마음을 모았지만 달맞이 체코빵집 주인이 내놓은 사비수빵과 계속 따끈하게 채워주는 꽃차를 홀짝이며 그 자리에서 피우는 정담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