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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oniist Nov 25. 2021

이렇게 된 이상 분위기로 간다


지금 사는 집에는 티비를 들이지 않았다. 원래 티비를 좋아하지 않기도 했고 라고 쓰고 싶지만 사실 티비를 너무 많이 보기 때문에 취한 강제적 조치다. 한편으로는 콘텐츠를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티비는 굳이 안봐도 되는 것까지 보게 만든다. 지금 나는 웨이브, 넷플릭스 두 가지를 구독하고 있다. 덕분에 보고 싶은 것들만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다. 구독 초기에는 무엇을 봐야할지 썸네일을 훑으며 시간을 허비 했는데 이젠 볼 것이 없으면 굳이 접속하지 않는다. 현명해졌다기보다는 구독료에 둔감해졌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OTT에서는 볼만한 작품들이 매우 짧은 간격으로 속속 공개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콘텐츠들이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새삼스럽다. 기존 미디어에서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볼 때 광고와 PPL을 감내해야 했는데 OTT의 콘텐츠는 상대적으로 이런 광고에 대한 피로감이 덜하다(광고에 대한 피로감으로 치면 라디오를 따라올 수 없다. 긴 광고 시간은 이해를 한다고 해도 DJ들이 광고 시작 전에 협찬사 목록까지 읊어주는 건 이해하기 힘들다. 고안해 낸 쪽은 그쪽대로 사정이 있었겠지만 듣는 쪽으로선 광고에 대한 반감만 생긴다). 누군가 예견했듯이 시간을 내어주고 광고를 볼 것이냐 아니면 돈을 내어주고 콘텐츠만 볼 것이냐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다. 아직은 OTT를 선택하고 있지만 스물스물 올라가는 구독료를 보고 있자니 앞으로의 일은 장담할 수 없겠다.


최근 본 콘텐츠는 <D.P.> <오징어게임>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이하 '이상청')> <지옥> 이렇게 네 편이다. <D.P>는 영화 <반도>에서 굉장히 인상 깊었던 구교환 배우 때문에 보기 시작했고 <오징어게임>은 영화 <토이즈>를 떠올리게 하는 썸네일 때문에 <지옥>은 흥미로운 크리처 때문에 정주행했다. 그리고 <이상청>은 윤성호 연출이라고 적혀 있어서 봤는데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가장 좋았다. 아니 탁월했다.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지만.


살면서 좋아하는 것을 만나는 경험은 특별하다. 삶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기 때문이기도 하고(남들이 좋다고 하길래 좋아하는 척 했던 건 많다.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비틀즈, 중국집 볶음밥, 고흐, 위스키, 스타워즈, 월드컵, 미라클모닝, HI-TEC-C 등등) 나도 모르는 내 취향을 알려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윤성호 연출의 인디시트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가 바로 그렇다(https://www.youtube.com/watch?v=Us0jD1dEkrs).


2010년, 우연히 보게 된 이 짧은 시트콤에 푹 빠져버렸다. 5분이 채 안되는 1화를 보면서 알 수 있었다. 나는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구나(이전 글에서 이야기했지만 DFW의 글을 만났을 때 느낌과 비슷하다). 별 내용도 없는 이 시트콤을 왜 좋아했을까 당시에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 <이상청>을 보며 다시 되뇌었다. '역시...나 이런 거 좋아하네'.


이번에는 11년 전처럼 '그냥 좋다'라는 감상으로 넘길 수 없었다. 어쨌든 나도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었으니 적어도 내가 무엇을 왜 좋아하는지 정도는 알아야지. 그리고 그걸 내 콘텐츠에 넣어봐야지. 나는 내가 만든 걸 좋아하고 싶으니까.


열두 개의 에피소드 내내 캐릭터와 이야기가 종횡무진하는 <이상청>을 뜯어보면 장점들이 많다. 담대한 구성과 스토리, 모든 등장인물들에 대한 창작자의 애정, 깊이 있는 대사, 확실한 캐릭터와 이를 살리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아는 사람만 보이는 디테일(4화에서 문체부 지원사업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 프로그램의 참가자인 할머니들이 문체부 장관에게 잘보이기 위해 즉석 공연으로 <도둑의 돈을 돌려준 선비 홍기섭>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한다. 제목이 생소해서 그냥 지어낸 건가 하고 찾아봤는데 실제로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들의 레퍼토리 이야기 중 하나인 듯 하다(https://www.korea.kr/news/policyNewsView.do?newsId=148871857). 문체부 직원들이 봤다면 이런 디테일에서 터지지 않았을까)까지.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 어떤 콘텐츠를 좋아한다고까지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내가 이 작품을 좋아하는 건 역시 '분위기' 때문이라고 해야겠다.


대부분의 드라마나 영화는 이야기 전개를 위해 열심히 달린다. 긴장감을 쌓고 갈등을 모으고 떡밥을 던지며 보는 사람들을 몰입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상청>은 시청자가 감정을 쌓아가려고 하면 툭 건드려서 무너뜨린다. 자꾸 옆길로 샌다(예를들면 이런거다. 문체부의 체수처(문화예술체육계 범죄 전담 수사처) 출범식에 자문위원장을 맡기로 예정되어 있던 국회의원의 아들이 어린이집 가해아동으로 지목되면서 여론의 지탄을 받게 된다. 문체부장관(김성령)의 야심작인 체수처가 출발부터 삐그덕거리는 위기 상황에서 문체부 기획조정실장 최수종(정승길)은 '출범식 당일에 이 이슈가 터졌으면 더 큰일이었을 것'이라고 말하며 장관을 진정시킨다. 그 말을 들은 장관이 고맙다고 말하는데 그 뒤에 최실장이 이렇게 말하는 장면을 굳이 넣는다. "제 특기죠. 어떤 최악의 상황에서도 그보다 더 최악을 생각해냅니다"). 이러한 이야기의 일탈이 쌓이면서 드라마가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너무 슬퍼 엉엉 울다가 문득 우는 내 모습이 궁금해져서 거울을 들여다보는' 그런 분위기다. 


시종일관 갈등이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야기보다는 가끔씩 옆길로 새는 이야기가 나는 훨씬 더 리얼하게 느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실제로 우리 삶이 그러하니까.


<이상청>을 '산만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자주 옆길로 샌 덕분에 조연들까지 입체적이되었고 드라마는 두꺼워졌다. 대단한 건 옆길로 새긴 했어도 이야기가 본분을 잃지 않고 제 시간에 목적지에 아주 잘 도착했다는 것이다. 거울을 들여다보긴 했지만 슬픈 일을 잊지는 않았듯이. 


무라카미 하루키는 '독자의 마음을 진정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뛰어난 문장도 아니고 재미있는 줄거리도 아니며 자연스레 배어나오는 분위기'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감상하는 내내 모종의 분위기 안에 나를 가둬두는 작품을 나는 좋아한다. 윤성호 연출의 작품들이 나에게는 그런 셈이다. 어떤 주제나 의미를 전달해주는 것보다도 분위기를 경험시키는 콘텐츠가 내가 만들고 싶은 콘텐츠이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더 자주 봐야겠다.


<이상청>을 보느라 <조던>은 읽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이 전기에 '분위기'는 없다.

파리는 분위기가 있다


* 듣고 있는 것 : 엔드띠어리(윤하 6집)

* 마시고 있는 것 : 칸타타 콘트라베이스 콜드브루

* 읽고 있는 것 : 안녕 내사랑(레이먼드 챈들러),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레이먼드 챈들러), 권외편집자(츠즈키 교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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