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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oniist Dec 12. 2021

카레와 페퍼로니 피자를 먹어서 다행이야


작년부터 에어팟을 사용하고 있다. 사용하기 전에는 정말 쓸모없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사용하게 되니 정말 쓸모없는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에어팟의 사용자 경험은 '일반 이어폰보다 편리하다' '왜냐하면 지하철에서 모르는 사람의 가방에 내 이어폰 줄이 걸려 그 사람이 내릴 때 따라 내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에어팟을 착용한다는 것은 분리된 신체의 일부를 내 귀에 부착하는 일이었다. 새로운 신체를 탑재한 나는 주변의 소음을 제거하거나(노이즈캔슬링) 소리를 입체적으로(공간음향) 듣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에어팟을 착용하는 일은 단순히 무선 이어폰을 사용한다기보다는 사이보그가 되는 일에 가까웠다(그래서 에어팟을 착용한 채로 샤워를 했다거나 혹은 끼고 샤워를 해도 되냐고 묻는 사람들이 나는 전혀 이상하지 않다. 신체의 일부니까).


사이보그지만 다 괜찮은 건 아니기에 에어팟은 청소를 해줘야 청결하게 사용할 수 있다. 마침 카메라 렌즈를 구입할 때 사은품으로 받은 렌즈청소용 티슈가 있어서 이것으로 닦고 있다. 흰색으로 만든 덕분인지 에어팟, 이어팁, 에어팟 케이스에 달라붙은 이물질들이 눈에 잘 띈다. 그래서 생각날 때마다 닦는 편인데 어쩔 땐 닦지 않아도 될 정도이고 어쩔 땐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뭐했나 싶은 수준이다. 에어팟을 닦는 날을 아예 정해 놓고 주기적으로 닦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프라하의 어느 인형 가게

에어팟을 닦는 일뿐만 아니라 뭐든지 일정을 정해 놓고 주기적으로 반복하면 왠지 삶이 단정해질 것 같다. 반복적인 미션들로 삶을 채우고 단순히 그것을 의식처럼 반복하는 것. 시간을 통제하고 삶에 질서를 세워 자기를 계발하는 것. 한 때 내가 바라던 삶의 모습이다. 그래서 꽤 많이 시도를 해봤지만 어쩐지 매번 실패했다(이때 자주 읽었던 글이 야구선수 이치로의 루틴을 다룬 글들이다. 이치로는 마치 수도승처럼 삶의 변수들을 최대한 통제하면서 매일 똑같은 루틴을 지키며 살았다고 한다. 매일 똑같은 것을 잡념 없이 반복한다는 것이 너무 매력적이었는데 특히 미국에 진출한 뒤로 시합 전에는 항상 아침에 카레, 점심에 페퍼로니 피자만 먹는다고 적혀 있는 부분이 인상 깊었다. 왠지 닭가슴살 샐러드 같은 걸 먹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맛있는 걸 먹어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프라하 K+K호텔 조식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삶에 질서를 부여하고 시간을 통제하며 살고 싶은 욕구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끝에 달콤한 보상을 기대하는 마음도 없지 않을 것이다. 요즘 자신만의 리추얼, 루틴을 만들고 소개하는 문화가 번지는 것도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단정하고 조신한 삶을 일구고 이를 통해 결실을 맺는 모습이 좋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리추얼』(메이슨 커리 지음)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인들이 일상 중에 마치 의식처럼 반복하는 일들을 소개한 책이다. 루틴을 만드는 일에 심취해 있을 당시 구입했는데 그때는 이들의 성공 비결이 모두 이 '리추얼'에 달려 있는 것만 같았다.


리추얼과 루틴으로 삶을 채우는 것이 가능한 사람도 있겠지만 다수의 시도와 실패를 경험한 뒤 나(정확히는 지금의 나)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복되는 회사 생활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남는 시간마저 반복되는 무언가로 채운다는 것은 역시 삶 전체를 갑갑하게 만드는 일이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외롭게 서서 이름이 써진 명찰을 달고 입학식을 치른 이후로 삶의 대부분은 학교 아니면 회사 생활의 반복이었다. 이 자체로 거대한 루틴이었고 다시 생각해봐도 답답한 시간들이었다. 이제 나이가 들어 일상이라는 약간의 시간에 대한 자율성을 획득한 지금, 이것마저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무언가로 채운다면 이건 강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반복 숙달로 어떤 것을 이루고 무언가가 되어야만 한다는 다분히 신자유주의적인 강박. 매일 아침 카레, 점심 페퍼로니 피자를 먹는 삶이 매력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내가 그럴 이유는 없다. 그보다 나는 이치로가 될 수 없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맞서는 지혜는 웬만하면 체념하고 포기하는 것이다.

'다다다' 콘텐츠를 만들면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주기적으로 생산해내야 한다는 강박을 없애기 위해 노력한다. 성과를 이루는 것보다 이 작업을 기분 좋게 즐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싶을 때 그리고 쓰고 싶을 때 쓴다. 안다. 이렇게 하면 인스타그램, 블로그, 브런치의 알고리즘에 외면당한다는 것.


하지만 반복 숙달을 통한 훈련으로 성과를 이뤄내는 삶을 살다 보니 좋아하는 마음으로 뭔가를 즐기는 법을 잊게 되었다. 너무 하고 싶어서, 너무 좋아해서 하는 일을 정말 오랜만에 하고 있다. 자칫 오버하다 이것마저 싫어지면 안 된다. 이 작업과 오래 동행할 수 있도록 내가 무리하고 있지 않나 스스로 잘 살펴야 한다.

체코 체스키 크룸로프

이 글을 쓰기 위해 『리추얼』을 오랜만에 꺼내봤다. 목차에 있는 대단한 인물들의 이름을 죽 훑어보니 놀라운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이 책을 구입할 때만 해도 그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리추얼이라면 내 아무리 답답하고 지겨워도 한 번 따라 해 보리라 마음먹고 131쪽을 펼쳐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글은 아래의 문장으로 끝난다.


"~그런데 내가 어떤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대로 따르려고 하면 글쓰기 자체가 헛된 짓 같고 나를 채찍질하는 것 같아서 나는 일정한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정확히 내 마음과 같다.

의식을 치르듯 반복을 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자주 궤도를 이탈한다. 그림을 며칠 동안 손에서 놓을 때도 있고 책을 읽지 않거나 글을 쓰지 않을 때도 있다. 다행히 나를 다시 궤도에 올려놓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비교적 간단하다. 먼저 그 길을 간 사람들의 인터뷰를 찾아보는 것이다. 찰스 슐츠, 우라사와 나오키, 레이먼드 챈들러, DFW, 무라카미 하루키 등 나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읽다 보면 다시 궤도에 오를 힘이 생긴다.


격무에 시달린 11월이 끝나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요즘인데 다시 궤도로 오르기 위해 요즘은 윤종신님의 구글 강연 영상을 자주 보고 있다. 구글에서 윤종신을 강연자로 초청했다는 것부터 의미가 심장한데 콘텐츠 창작 및 산업의 중요한 핵심들을 이야기하고 있어서 '디지털 시대에 콘텐츠를 만든다는 것'에 관한 중요한 감각을 복기시킬 수 있다(그리고 윤종신의 유머 센스가 상당히 좋다. 여담이지만 소싯적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갔었던 김장훈 콘서트에서 윤종신이 게스트로 나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예능인 이미지는 없었고 뮤지션 이미지만 있었는데 그때 보여준 입담이 굉장해서 '이렇게 재밌는 사람이었나'라고 놀랐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그의 멘트는 이것이었다. "이따가 관중석을 돌면서 노래를 부를 건데 너무 놀라지 마세요. 가까이서 보면 원빈인 줄 착각하실 수도 있어요." 글로 쓰니 별로 재미없나. 아무튼 그 이듬해 '팥빙수'가 발표됐다).


윤종신의 히트작인 '월간 윤종신' 은 2010년부터 매월 성실하게 나오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창작자 자신이 굉장한 루틴이나 리추얼을 지키며 작업을 하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굉장히 힘을 빼고 강박 없이 작업을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 콘텐츠로 특정 계층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겠어'와 같은 전략은 없다. 윤종신의 표현대로라면 '내가 해보고 싶은 것을 꾸준히 할 뿐이다. 흥행은 운이 좋으면 얻어걸리는 것'이다. 재미있는 건 '월간 윤종신'을 받아보는 사람들에게도 그 마음이 전해진다는 것이다. 나도 '월간 윤종신을 매월 챙겨봐야겠어!'와 같은 다짐은 없다. 생각이 나면 한 번씩 들어가서 보고 좋으면 오래 보고 아니면 안 볼뿐이다. 개별 곡에 대한 호오와 상관없이 '월간 윤종신' 자체를 좋아한다. 10년 넘게 '월간 윤종신'이라는 콘텐츠가 나와 동행한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 결국 독자에게 전달되는 것은 창작자의 리추얼이 아니라 창작자의 자세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1학년생 마이클 조던은 전미 대학 농구 대회(NCAA) 결승전에서 위닝샷을 넣으며 우승의 주역이 된다. 농구 황제는 어떤 루틴을 갖고 있을지 이 책을 읽다 보면 나오겠지. 궁금하다. 따라 하고 싶다. 그렇지만 기억해야겠지. 나는 농구 황제가 될 이유가 없다. 아니 될 수 없다.


- 듣고 있는 것 : '언젠가 너와 나(feat.카더가든)' 윤지영

- 읽고 있는 것 : 리추얼의 종말(한병철),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이 아닌(정지돈), JORDAN(롤랜드 레이즌비)

- 마시고 있는 것 : 카페 광화문의 커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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