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roniist Dec 29. 2021

그 말을 조금 더 빨리 들었더라면

대학교 2학년, 조금씩 두툼한 코트를 입기 시작하던 11월이었다. 선배들과 술을 마신 늦은 밤에 방향이 같은 사람들끼리 5호선 승강장에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난 대부분의 대학교 2학년 또는 스물한 살이 그렇듯이 그저 듣기만 하던 스무살 새내기 시절을 벗어나 나름의 가치관과 철학으로 무장하고 사람들과 이런저런 인생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마침 빼빼로데이가 얼마남지 않아서 지하철을 기다리던 우리는 빼빼로데이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고 나는 큰 고민없이 심드렁하게 이야기했던 것 같다.


"다분히 마케팅적인 의도로 만들어진 그런 날에 왜 난리인지 모르겠어요. 평소에는 빼빼로 잘 먹지도 않잖아요. 저는 그런 '데이' 같은거 별로 챙기고 싶지 않아요."


그러자 그 옆에서 그날 술자리 내내 힘든 연애에 대해 이야기했던 한 여자 선배가 자신의 청자켓 주머니에 두 손을 푹 찔러 넣으며 이렇게 말했다.


"야. 그런 거 다 알면서 챙기는 게 사랑이야."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 누나가 왜 그렇게 인기가 많은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아는게 없는지.


가치관이란 것이 생겨나면서부터 모든 의식이나 형식들이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명절마다 치르는 차례, 성묘, 제사는 번잡스럽게 느껴졌고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생일, 입학식, 졸업식 같은 행사는 많이 민망했다. 회사에 다니면서 그 생각이 더 굳어졌는데 여러 행사들을 치르면서 진행했던 대부분의 의식(개회식, 폐회식, 출범식, 신년회, 송년회 등)은 준비하는 사람 따로, 즐기는 사람 따로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회사 일은 준비하는 사람들이 월급을 받는 반면 제사, 차례 같은 가사는 준비하는 사람의 노동에 대해 즐기는 사람들이 비용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는다.


마음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돌아가신 분들을 기리는 마음, 이번 행사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마음, 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 마음만 있으면 굳이 거창한 의식을 치르지 않더라도 평소 행동에서 내 진심이 드러나며 다른 사람들에게 고이 전해질 것이다라고 믿었다. 특별한 날만 야단스럽게 챙기는 건 위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늘 기념일은 부담스럽고 거북하기만했는데 그날 그 선배에게 들은 그 한마디가 나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위선적인 건 너야(애송아). 마음만 있으면 다 되는 줄 알지?(애송아)"


(이상하게도 그 이후의 일들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가 뭐라고 반박을 했던가? 그 선배와 같이 지하철을 탔었나? 그래서 누군가에게 빼빼로를 줬던가? 오직 그 선배와 나눈 이 짧은 대화만 승강장의 형광등 조명과 함께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나는 평소의 내 마음을 '완전'한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기념일 같은 의식은 이미 완전한 것에 얹는 불필요한 장식이라고 여겼다. 레몬에이드가 담긴 유리잔에 꽂혀 있는 레몬 조각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를 아는 지금, '의식'은 있으나마나한 레몬 조각이 아니라 바닥이 드러난 레몬에이드를 다시 채워넣는 일이라고 고쳐 생각하고 있다.


연인과의 100일 또는 1년이라는 시간을 기념하면서 반대로 그 시간 동안 얼마나 서로를 잊은 채 살았는지 생각해본다. 졸업식을 치르면서 잠만 잤던 수업 시간이나 멍하니 허비했던 시간의 양을 떠올려본다. 차례를 지내면서 지난 명절 이후로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음에 화들짝 놀래 본다. 내 생일을 자축하며 지난 1년 간 태어난 것에 별로 감사하지 않았던 날들의 무게를 느껴본다. 나는 정말 내내 진심이었나. 의식을 통해 내 착각을 확인한다. 나는 내 기대보다 진심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다시 진심이 생겨난다.

어떤 시절은 그저 의식과 의식 사이를 채우는 작은 사각 스티로폼 같은 것들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모르는 친구들과 운동장에 줄을 맞춰 서서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입술을 꼭 깨물고 주먹을 꽉 쥐었던 초등학교 입학식부터 전람회의 '졸업'과 015B의 '이젠 안녕'을 무한반복해서 틀어대던 중학교 졸업식까지의 시절, 부모님의 배웅을 받으며 처음 해외로 떠났던 어학연수의 시작부터 텅빈 외국인 강의실을 홀로 돌아다니며 핸드폰으로 빈 자리들의 사진을 찍어대던 어학연수의 마지막날까지(어학연수가 끝났음을 축하하기 위한 내 나름의 의식이었다). 시작과 끝의 의식이 그 사이의 시간보다 또렷이 기억에 남아있다. '기간'보다 중요한 '순간'이다.


의식이 거추장스러운 건 불필요하게 비대해진 형식과 겉치레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걷어내고 삶 곳곳에 그러나 빽빽하지는 않게 나만의 의식을 세우고 의식에서 의식으로 이동하듯 산다면 적어도 내가 진심을 다해 살고 있다고 착각하지는 않을 것이다(매순간 최선을 다해, 충실히, 마치 인장을 찍듯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기껏해야 기념일을 잊지 않고 잘 챙기는 것, 의식을 온 마음을 다해 즐기는 것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그 외의 시간은 지금처럼 아등바등하며 살 수밖에). '빼빼로데이쯤 그냥 넘겨도 내 진심을 알아줄거야' 라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다가오는 12월 31일에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나만의 의식을 가져볼 생각이다. 광화문에 사람이 잘 찾지 않는 카페에서 지금까지 업로드했던 글을 쭉 읽어보는 것도 괜찮고 익선동에 있는 작은 바에서 한 해 동안 사용한 다이어리를 뒤적거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단지 그런 시간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2021년의 문을 잘 닫고 다가오는 2022년의 문을 기쁘게 열 수 있을 듯하다.


이어지는 조던 이야기. NCAA에서 소속 대학팀을 우승으로 이끈 조던은 매스컴과 대중의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며 자신의 달라진 위상을 실감한다. 환영 행사, 축하 연회, 만찬회 등 각종 행사가 불편했지만 조던은 새롭게 획득한 지위를 마음껏 누렸다고 한다. 인생이 달라졌음을 체감한 이 청년은 농구황제로 가는 의식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이다.


- 요즘 듣고 있는 것 : 캐롤

- 요즘 마시고 있는 것 : 커피리브레 크리스마스블렌드

- 요즘 읽고 있는 것 : 피너츠 완전판 2권(찰스 슐츠),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카를로 로밸리)


* 이 글은 한병철의 <리추얼의 종말>을 읽고 떠오른 단상들을 묶어서 썼다.








        

작가의 이전글 카레와 페퍼로니 피자를 먹어서 다행이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