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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oniist Jul 19. 2022

누구에게만 벨 에포크


오를리 공항에 도착했을 때 파리는 푸른 새벽이었다. 장거리 비행이 처음이었던 나는 입이 텁텁한 게 싫었고 씻고 싶었다. 그 때문인지 파리는 처음이었지만 기대감이 없었다. 숙소에 짐을 풀지 못하고 바로 일정을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짜증이 온몸을 순환하고 있는 듯했다.


공항에서 파리 시내로 진입하기 위해 열차를 탔다. 동행에게 이끌려 아무 생각 없이 타라면 타고 내리라면 내리는 영혼 없는 여행객이었기에 뭘 타는지 어디서 내리는지도 몰랐다. 한 겨울의 새벽이라 차창 밖의 장면들은 삭막하기만 해서 왠지 마음이 더 추워지는 듯했다. 같이 간 누구 하나 말이 없었고 내리라는 지시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역에 도착하자, 드디어 내리라는 말이 들렸다. 어딘지도 모른 채 일행을 따라 내리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열차 플랫폼까지 들어와 있는 비둘기들이었다. 비둘기는 역사 안의 베이커리 주위에 모여들고 있었고 연신 바닥의 빵가루를 쪼아대는 중이었다. 비둘기가 왜 여기까지 들어와있지?라는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파도처럼 몰려드는 빵 냄새를 무방비 상태에서 흡입하게 되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우리 일행은 어느새 그 베이커리를 비둘기와 함께 에워싸고 있었다. 내 몸을 순환하고 있던 짜증의 농도가 이때 조금 옅어졌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그 지역의 언어를 처음 들었을 때 비로소 '내가 여기에 왔구나' 하는 실감이 난다. 광주의 택시 기사님, 당진 횟집의 아주머님, 부산 호텔의 매니저님들이 내게 처음 건넨 말에서 광주에, 당진에, 부산에 왔다는 실감을 했다. 그 지역의 사투리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이 사람들 눈에도 내가 보이는구나' '여기 먼 곳에서도 내가 존재하는구나'라는 묘한 실감과 안도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여행자를 못 본 척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들은 정말 자신의 존재가 지워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파리에 왔다는 실감을 못하고 내내 허공을 맴돌던 내 영혼 역시 이 비둘기 빵집에서 일하는 점원의 한마디로 인해 바로 파리 중심지로 소환될 수 있었다.


"Oui."


Yes가 아닌 Oui를 쓰는 나라(톨레랑스의 나라이지만 Yes는 용서하지 않을 것 같은 나라). 나는 프랑스에 있었다.


맛있는 크루아상과 커피가 마음을 살짝 어루만져 주었지만 악명 높은 파리 지하철역과 소매치기들 때문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 지금 검색해 보니 우리가 내린 곳은 뤽상부르(Luxembourg) 역이었다. 어서 여길 빠져나가 안전한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출구를 향해 잰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우리는(특히 나는) 파리를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아무 준비 없이 바로 파리 시내를 맞닥뜨리게 되었다(그때는 이게 무슨 결과를 가져올지 몰랐지만).


뤽상부르 역 출구의 계단을 오르자 조금씩 바깥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건물의 지붕들부터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푸른색 지붕의 오래된 건물들(당시에는 롯데월드 어드벤처에 어울릴 법한 건물들이라고 생각했다. 롯데월드 어드벤처에는 후렌치레볼루션도 있으니까. (이 어트랙션이 프랑스혁명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지만 어차피 한국 사람들은 청룡열차라고 부르니까 작명은 크게 상관없는 것 같기도 하다. 1층의 스페인해적선도 여전히 바이킹이라고 불린다))이 얼핏 보였다. 뤽상부르 역은 테마파크 안에 있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며 계단을 조금씩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기대감이 뒤에서 나를 미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출구로 나온 순간, 그때 깨달았다. 이 도시는 저 푸른 지붕의 오래된 건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사방에 온통 푸른 지붕의 건물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입을 벌린 채 그 충격을 온몸으로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인생의 중요한 순간이며 파리에 대한 경외가 시작되던 순간이다.

만일 비행기가 새벽에 도착하지 않았다면, 파리에 대한 기대감이 식지 않았다면, 지하철 계단을 오르며 장면의 대전환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충격이 가능했을까. 아니, 이것이 푼크툼이라면 훨씬 그 이전부터 내 삶의 많은 시간들은 파리와 조응할 수 있는 방향으로 축적되어 온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파리를 알아간다는 건 나를 알아간다는 것이 아닐까. 함께 한 동행들이 모두 파리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도시였고 누군가에게는 지저분한 도시였다. 하지만 파리는 나를 확실히 찔렀다(괜히 펜싱 종주국이 아니다).


그렇게 파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가 되었고 첫 방문 이후 서너 번 더 방문했을 때쯤엔, 제법 파리 시내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 파리가 다시 한번 나를 찔렀다.


그날은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하기로 되어 있어서 다른 일행들보다 먼저 준비를 하고 숙소에서 홀로 나와 새벽의 파리 시내를 걷기 시작했다. 새벽 5시쯤이었을까. 겨울이라 여전히 거리는 어두웠고 인적도 드물었다. 숙소가 개선문 근처 대로변에 있어서 쉽게 숙소로 돌아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같은 길이어도 낮길과 밤길이 다르기 때문인지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비슷비슷한 건물과 거리 풍경은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기억에 의지하여 더듬더듬 걸었지만 어느 순간 점점 숙소로부터 멀어지고 있음을 직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공포로 다가왔다.

그 새벽의 개선문

아름답던 파리의 거리도 낭만적이던 할로겐 가로등도 두려움을 배가시키는 장치일 뿐이었다. 이따금씩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은 경계와 공포의 대상이었다. 혹시나 저 사람이 나를 해치진 않을지 (차마 눈을 마주칠 순 없지만)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 사람의 움직임을 감지해야만 했다. 아마 누가 말을 걸어왔다면, 아니 다가오는 시늉만 했어도 소리치며 달아났을 것이다. 그렇게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를 헤맨 끝에 겨우겨우 숙소에 도착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겨울이었음에도 스웨터는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이젠 안전하다는 안도감이 들자 나의 공포는 한국의 밤거리에서(어쩌면 백주대로에서도) 이러한 공포를 느끼고 있을 사람들에 대한 상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건 너무도 쉽게 할 수 있는 상상이었지만 여지껏 한 번도 하지 못한 상상이었다. 엄연히 존재하지만 내 세상에는 없던 것. (리베카 솔닛의 표현에 의하면) 그래서 그것이 없다는 것조차도 몰랐던 것. 그 부재의 존재를 새벽의 공포를 겪고 나서야 겨우 상상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자각하자 뾰족한 어떤 것이 나를 아주 깊게 찌르는 것만 같았다.


읽고 있는 것 : 문장독본(미시마 유키오), 제텔카스텐(숀케 아렌스),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리베카 솔닛)           

듣고 있는 것 : 없음            

마시고 있는 것 : 커피리브레 울서울서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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