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되지 못한 이야기
2024. 4. 24.
해킹 이후 약 2달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그간에 해왔던 일과 감정들을 기록해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2월 12일에 새로운 계정을 만들고 1화부터 에피소드 재업로드를 시작했다. 그중에서 1화부터 11화는 새로 그린 뒤, 원래 버전과 함께 올렸다. 질적 수준의 변화 추이를 독자들이 가늠하기 위해서는 원래 버전만 업로드하는 것이 맞겠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초기의 몇 편이 너무 이질적으로 느껴져서 이참에 수정했다. 그리고 내 그림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줄곧 생각하게 되었다. 스타일이란 걸 논하기에는 부족한 실력이지만.
- 많을 때는 7개, 적을 때는 1개의 에피소드를 업로드하여 4월 7일까지 총 227개의 에피소드를 재업로드하였다. 다시 보았을 때 역시 좀 부끄럽거나 전체 맥락에서 어긋난 8개의 에피소드가 제외되었다. 재업로드는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는데, 맞춤법 오류나 빠진 그림들이 있어서 수정 작업도 병행했다. 올리면서 지금까지 그린 분량이 적지 않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니. 그런데도 아직 초반이라니.
- 이전 계정에서는 에피소드와 아트워크만 피드에 올렸었는데 새로운 계정에는 블로그에 쓴 글도 카드 뉴스처럼 작업하여 피드에 업로드하고 있다. '나의 해킹일지' '전국노래자랑 관람기' '故 토리야마 아키라 추모글' '영화 <로봇 드림> 리뷰' 등의 글을 피드 상단에 일정 기간 동안 고정하였다. 인스타그램 광고를 통해 홍보도 진행했는데 덕분에 이전보다 많은 분들에게 글을 노출할 수 있었다. 그분들이 읽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블로그를 찾아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드린다. 앞으로도 피드 상단 첫 줄은 이렇게 글이나 아트워크를 고정하는 형태로 사용할 계획이다.
- 이번 해킹을 경험하면서 메타의 '기계적임'이 얼마나 답답한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계정에 '나'라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임을 독자들에게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덧 : 골라미 일기'라는 만화 일기를 인스타 스토리에 두 편 업로드하였다. '다다다'보다 더 만화적인 표현을 할 수 있는 콘텐츠이기 때문에 실력 향상에도 도움이 될 듯하다. 이 콘텐츠를 통해서 독자분들이 '다다다'를 그리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아시기만 해도 좋겠다.
- 남는 시간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예전부터 관심이 있었던 '애니메이션' 작업도 해보았다. 커피를 마시고 대화하는 단순 동작의 18초짜리 영상이지만 작업량은 상당했다. 툴은 '어도비 애니메이트'를 사용했는데 처음 써보는 것이어서 실수도 많았고 효율적이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중간중간 캐릭터가 움직이는 모습을 확인하는 건 마법 같은 일이어서 대체로 즐겁게 작업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를 선택해서인지도 모르겠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봄날의 반차'. 생각만 해도 흐뭇해지는 것들이다(직장을 그만둔지는 제법 되었지만). 과연 완성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으나, 생각했던 표현들도 구현해 봤고 색감도 지금보니 제법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내 캐릭터가 '연기'를 한다는 건 어쩔 수 없이 뭉클한 부분이 있다. 애니메이션 공부를 더 해서 작업을 이어나가고 싶다. 그땐 독자들이 좋아하는 에피소드를 해보는 걸로.
- 이 외에도 커피를 하루에 세 잔씩 마셨다는 것, 착하게 살려고 노력했다는 것, 이른 새벽 인왕산에 올라 좋은 기운을 받으려 했다는 것, 동네에 있는 400년 된 은행나무의 기둥을 붙잡고 하소연을 했다는 것 등도 기록해둔다.
스토리 작법서들이 한 입으로 꼽는 가장 인기 있는 이야기 부류는 '고난 극복의 서사'다. 주인공에게 고난이 닥치고 끝내 그것을 극복하는 이야기를 우리는 좋아한다. 내가 '다다다'를 창작하는 행위가 하나의 이야기라면 '해킹'이 그 고난에 해당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것을 극복해야만 이야기가 된다. 나의 이 창작기는 결국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이야기가 되지 못한 이야기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점이 내가 가장 궁금한 부분이자, 두려운 부분이다.
결국 남은 시간까지 내가 할 일들을 최선을 다해 해내는 것 뿐, 다른 선택지는 없는 듯하다. 고민하고 그리고 또 그릴 것이다. 그전에, 한 가지 더 기록해 두고 싶은 것이 있다. 마침내 사람들에게 내가 이 작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내 입으로 말하게 되었다는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