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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정 Jun 19. 2024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 예민함을 버리는 중입니다.

하얀 종이, 밥공기, 잘 정돈된 공간. 난 그 상태가 망가지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그래서 다이어리를 사더라도 글을 쓰다가 망치면 어떡하지? 잘못 써서 지저분해지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으로 몇 페이지 쓰지 못하고 넘긴 다이어리가 많다. 밥을 먹을 때에도 하얀 쌀밥에 양념이 묻는 게 싫었다. 그래서 꼭 하얀 상태가 남을 수 있게 밥을 퍼먹었다. 공간도 마찬가지이다. 뭔가 망쳐지는 게 싫어서 잘 안 건드리는데 한 번 망가지기 시작하면 완벽한 공간을 만들지 못할까 봐 또 건드리지 못한다. 엄청 깔끔 떠는 깔끔쟁이는 아니다. 그래서 이 상황이 벌어지면 더욱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다. 일종의 강박에 가까운 예민함때문에 선뜻 뭔가를 시작하지를 못한다.


하지만 운동을 시작하고 1년 반 정도가 되었을 때였을까? 슬슬 운동을 하다가 다치기 시작한다. 사실 그전까지는 다칠까 봐 굉장히 몸을 많이 사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뭘 해도 적극적이지 못해서 잘 느는 것 같지도 않았다. 멍이 들기 시작한 게 처음이다. 여기저기 부딪히면서 온몸에 멍을 달고 살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정강이가 까지기도 하고 손바닥이 벗겨지기도 했다. 처음에는 정말 무서웠다. 그냥 작은 생채기 하나 나는 게 무서웠는데 별 거 아니더라. 멍이 들면 며칠이 지나면 그 멍은 없어지고, 까지고 피가 나도 며칠이 지나면 잘 아문다. 물론 영광의 상처는 살짝 남았지만. 난 뭐가 그렇게 무서웠던 걸까? 아마도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좀 틀리면 다시 하면 되고 잘못했으면 고치면 되는데 실수하는 게 무서워서 항상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아직도 많이 머뭇거리지만 이젠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서 예민함을 버리기로 했다.


그 첫 번째로 다이어리 막 쓰기를 시작했다. 난 다이어리 말고도 노트가 많은 편이다. 각 노트에는 목적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기는 하지만 하나같이 깨끗하다. 내 건데 좀 지저분하면 어떻다고 그걸 각 잡고 쓰려고 했으니 내가 나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들이붓는 격이었다. 나무를 하나씩 심다 보면 언제가 멋진 숲이 만들어져 있을 텐데 나는 이미 숲을 지정해 놓고 그 안에 아주 멋지고 완벽한 나무들만 한 그루 한 그루 심으려고 한 것 같다. 숲에는 좀 덜 자란 나무도 있고 좀 상처 난 나무도 있을 텐데 말이다. 아직도 난 멋진 나무만 심으려는 습성이 스멀스멀 올라오긴 하지만 그걸 꾹 누르고 다이어리에 막 써보는 중이다. 처음부터 완벽한 완성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내 다이어리는 여전히 듬성듬성 빈 공간들이 보인다. 지나간 날짜 페이지에는 이미 날이 지났기 때문에 적을 수가 없었다. 딱 그 날짜에 있었던 일을 적어햐 한다는 강박 때문이다. 이젠 그 공간을 메모장으로 사용한다. 공부를 할 때 쓰기도 하고,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나면 일기처럼 끄적이기도 한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조금씩 나의 예민함을 버리는 중이다. 언젠가 내 노트들이 그냥 편하게 적어 내려 가는 나의 생각들로 가득 차는 날들이 오길 바란다. 몇 년 뒤에 노트를 꺼내보면 그 시간 나의 미숙함조차 귀여워 보일지도...


어느 날 우연히 카페를 보다가 글쓰기 수업을 한다는 글을 보았다. 그냥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 이거하고 싶은데라고 말이다. 요즘은 정말 가끔 이런 내 마음의 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때는 놀랍기도 하고 나 자신이 기특하기도 하다. 그렇게 또 나의 즉흥적인 도전이 시작되었다. 바로 댓글을 달았는데 작가님이 수업이 가능하다고 답을 줬다. 글쓰기 수업은 일주일에 한 번 가는데 처음에는 너무 어려웠다. 나는 분명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적고 있었는데 어느새 현재의 내 얘기를 하고 있고 또 이미 벌써 먼 미래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쉽게 말해 횡설수설하고 있는 것이었다. 글이라는 게 읽는 것이든 쓰는 것이든 멀리하게 되면 그 능력치가 줄어드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블로그도 제법 꼬박꼬박 적을 정도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멀리했었다. 책을 읽는 일도 무조건 완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진입장벽이 너무 높았었고, 글을 쓰는 것도 진짜 잘 써야 한다는 생각에 선뜻 첫 글자를 적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런데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흔적은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기록하는 일은 모임을 통한 배움과 깨우침을 뇌에 저장하는 것과 별도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작업이다. '참여와 기록'. 이 두 가지는 선순환 역할을 하는 읽기 모임의 핵심이다. 각오와 결심도 좋지만 긴 시간을 함께하려면 기록하는 것이 더 좋다. 한 줄도 좋고, 한 장도 좋고, 더 많이 기록해도 좋다.

남낙현 <우리는 독서모임에서 읽기, 쓰기, 책 쓰기를 합니다>


이 글을 읽는 순간 나는 글을 적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사진과 영상을 찍는 것을 좋아한다. 전문적으로 배우고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1인 1 카메라를 소지하는 아주 편리한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여행이나 특별한 이벤트는 물론이고 일상 기록용이나 운동 기록용으로 항상 영상으로 남겨두고 있었다. 최근에는 자주 하지는 못하는데 그 영상과 사진을 편집해서 항상 나의 개인SNS에 올렸다. 단지 기록용이었는데 영상을 편집하다 보면 그 당시에 있었던 작은 일화나 그때 느꼈던 내 생각이 솔솔 떠오르고 난 그 생각들이 사라질까 아쉬워 영상에 집어넣고 있었다. 새하얀 종이에 혹은 새문서에 하나씩 적어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소소하게라도 나만의 글쓰기를 하고 있었다. 새로운 발견이었다. 아! 이런 게 하고 싶다는 거구나.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가는 글쓰기 수업시간이 나에게는 참 기분 좋은 순간이다. 책방에 들어서면 벽면 가득히 채워져 정리된 책들을 보면 눈이 즐겁고 조용히 글을 쓰는 시간에는 머릿속이 즐겁다. 글을 쓰고 있으면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 같으면서 빠르게 지나간다. 벌써 수업시간은 끝났고 난 또 일주일을 기다려야 한다.


선생님은 내가 기분이 좋을 때 글을 적으라고 했다. 첫 번째 수업 후 나는 기분이 좋은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지금이야!라고 느끼면 글을 쓰려고 했다. 아무리 시간을 기다려도 내가 기분이 좋은 순간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는 것도 없이 항상 바빴고 여유가 없다 보니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 번째 수업을 가는 날 아침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놓고 잠시 집안일을 미뤄두고 글을 썼다. 그 당시에는 마감에 쫓기는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근데 예상과 다르게 써지는 게 아닌가. 그렇다. 그 기분 좋은 시간과 기분 좋은 공간은 내가 만드는 거였는데 난 또 혼자 예민하게 바쁘게 사는 나의 현실을 한탄하며 왜 나만 시간이 없는 거야?라고 툴툴거리고 있었던 거였다.


남낙현 님의 우리는 독서모임에서 읽기, 쓰기, 책 쓰기를 합니다에 '쓰면, 써진다.'라는 글이 있었는데 아마도 이런 게 아니었나 싶다. 글쓰기 수업을 듣고 달라진 점을 말하자면 내 생각이 바뀐 것 같다. 좋은 타이밍은 누구도 아닌 내가 정하는 것이었다.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글자들을 시각적으로 적고 보면 머릿속이 비워지는 느낌이다. 항상 복잡했었다.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 할 일은 많은데 왜 이렇게 정리가 안되지 하는 느낌이 답답함을 자아냈다. 이젠 그 생각들을 글로 적어내기 시작했다.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 오늘 있었던 일들, 그중에서 기분이 상했던 일과 기분이 좋았던 일 등등 이런 생각들을 적음으로써 하나하나 정리가 되는 느낌이다. 차곡차곡 내 생각의 책들을 적어나가면 나만의 근사한 책장이 만들어질 것 같다. 기분 좋은 순간은 내 안에 있다. 그냥 두면 내 머리를 더욱 복잡하고 아프게 만들지만 적어내면 정리가 되면서 기분 좋음만 남게 된다.


쓰기, 완벽하지 않아 더 즐겁다.

글을 쓴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고 있지만, 나 자신과 마주 않아 이야기하는 것, 그 과정을 통해 나를 알아가는 것, 이것이 제일 크다는 생각을 해본다.

남낙현 <우리는 독서모임에서 읽기, 쓰기, 책 쓰기를 합니다>


이 글에 지극히 공감하는 바이다. 쓰는 것이야 말로 내 생각을 눈으로 보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다. 글쓰기 수업을 들으면서 바뀐 점이 몇 가지 더 있다. 첫 수업을 받으러 갔을 때 수업을 진행하는 책상 위에는 몇 권의 책들이 불규칙하게 쌓여 있었다. 그 당시 내가 느낀 느낌을 그대로 표현하자면, 선생님의 책들은 여기저기 많은 낙서가 되어 있었고, 아무렇지 않게 마구 접혀있는 부분도 많았다. 포스티잇도 많이 붙어 있었다. 다이어리조차도 잘못 써서 망칠까 봐 걱정하는 나에겐 얼마나 보기 불편했겠는가?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들 중에는 새책에 끼워져 있는 책커버조차 벗겨지지 않은 채 보관 중인 것도 많다. 심지어 책에 접힌 자국이 싫어서 페이지를 펼쳐 엎어두는 행동도 하지 않는 나에게는 정말 큰 문화충격이었다. 그나마 책이라는 대상에 허용이 되는 범위는 포스트잇 정도이려나? 그런데 선생님은 책을 많이 활용하라고 했다. 책 한 권을 사서 읽고 내 기억에 남는 한 구절이라도 있다면 충분히 그 책은 그 값을 다 한 거라고. 그러니 기억에 남는 부분은 표시를 해두고 내 생각도 적어보기도 하면서 활용을 해보라고. 조금 어렵다면 포스트잇을 이용해 보라고 하셔서 이젠 내 책에도 포스트잇들이 늘어나고 있다. 나중에는 꼭 책에 밑줄도 그어보고 내 생각도 옆에 적어봐야지.


또 다른 바뀐 점은 독서 방법이다. 아마도 내 가족들은 내가 독서를 즐기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난 정말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책을 한번 읽기 시작하면 얼마나 두껍던지 얼마나 권수가 많든 지 상관없이 밤을 새 가며 끝까지 읽을 정도로 좋아했다. 근데 시간이 없고 체력이 없어지니깐 이런 습관은 정말 독이었다. 난 이 책이 읽고 싶은데 굳이! 한 번에 다 읽을 시간이 없어서, 밤새워가며 읽을 자신이 없어서 책을 멀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조건 한 번에 완독을 해야 한다는 혼자만의 강박이 책을 읽지 못하는 원인이 되어버렸다. 글쓰기 수업을 시작하면 선생님은 항상 책을 먼저 보라고 한다. 여전히 여러 메모와 밑줄과 접혀있는 책들을 주면서 기억에 남는 글귀를 찾아보라고 한다. 첫 시간에는 '아니, 시간도 없는데 저 많은 책들 중에서 내가 기억에 남는 부분을 어떻게 찾으라고 하는 거지?'라고 생각을 했는데 수업 회차가 늘어감에 따라 그 생각은 싹 사라졌다.

처음에는 뭔가 어색했다면 어느 순간부터 그 짧은 순간에도 몰입도가 굉장히 좋아지는 걸 느꼈다. 읽기가 힘든 나에게 새로운 독서법을 알려주었다. 이렇게 읽으면 독서가 어려운 도전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었다.


 난 나의 예민함으로 나 자신을 자꾸만 가두고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더 많은 것들을 즐기고 해내기 위해서 나의 예민함을 하나씩 버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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