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이야기
2004년 5월 나는 아시아나 항공에 입사했다. 항공사라는 나의 직장은 그 어느 곳보다 자유로웠다. 그 당시의 나는 꽉 막힌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 게 정말 답답했다. 그래서 항공사는 정말 나한테 맞는 직장이라고 생각했었다. 언제든 친구와 해외로 여행을 떠날 수 있었고, 젊은 나이에는 밤새워서 근무해도 그 다음날 오전 일찍 퇴근하면 하루가 꽁으로 생기는 것도 좋았다. 일반적으로 아침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는 회사원들보다 훨씬 내가 나은 환경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고 나니 그 생각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혼자일 때는 피곤해도 그냥 쉴 수도 있었고 떠나고 싶으면 훌쩍 떠날 수도 있었는데 내가 책임져야 할 가족이 생기고 나니 자유로운 환경은 온데간데없이 그냥 고된 일만 남아있었다.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출근하는 것도 힘들었고 하루에 12시간씩 일하는 것도 힘들었다. 결혼 전에는 그 외 시간은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이었지만 결혼 후에는 나를 위한 시간은 쪼개고 쪼개어봐도 만들기가 힘들었다. 스케줄 근무로 이루어진 공항업무는 나의 생활리듬을 급격하게 망가뜨렸다.
2008년 첫째를 낳고 3개월쯤 되어서 복직했다. 그 당시의 나의 생활패턴은 오전 근무나 올데이 근무인 날은 보통 새벽 4시 반에는 집에서 나가야 했기 때문에 아이를 남편이 오전 7시 반쯤 출근하면서 어린이집에 맡겼고, 오전 근무 끝나면 서둘러 집안정리 후 데리러 가거나 올데이 근무 퇴근을 하면서 7시 반에 데리러 갔다. 그나마 오후 근무인 날은 내가 아이를 맡기고 집안일을 좀 하고 출근을 할 수 있었지만 퇴근이 늦어 결국은 근처에 사는 시부모님께 아이를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일상이었다.
JTBC에서 2022년 방영했던 나의 해방일지에서 미정이 한 대사가 난 아직도 머리에 깊게 박혀서 잊히지가 않는다.
“못하겠어요. 힘들어요.
지쳤어요.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건진 모르겠는데 그냥 지쳤어요.
모든 관계가 노동이에요.
눈뜨고 있는 모든 시간이 노동이에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흘러가고 있는 나의 일상 중에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에서 저 대사가 내가 그동안 느껴온 모든 감정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극 중에서 미정은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추앙을 선택했다. 나도 무언가가 필요했다. 누군가가 날 추앙해 주는 일은 모르겠지만 내가 무언가를 추앙할 수 있지 않을까? 무언가에 미칠 수 있지 않을까? 지금 그 당시를 다시 생각해 보면 남편과 내가 하고 싶은 일로 인해서 많이 싸웠었던 것 같다.
2019년도의 나는 진짜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진짜 이러다가 크게 건강을 해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항상 피곤에 찌들어 있었다. 거북목과 라운드숄더는 기본이었고, 체력도 굉장히 약했으며 양쪽어깨에는 커다란 곰돌이를 한 마리씩 올리고 다니는 것처럼 무거웠었다. 운동이 필요했다. 그 당시 한창 많은 건물들에 필라테스 센터들이 생겨 났으며 길거리에는 홍보종이를 나눠주는 사람들이 쉽게 눈에 띄었었다. 그중에서 가장 저렴하게 홍보를 하고 있는 필라테스 센터에 전화를 했다. 우선 체험 수업을 듣고 상담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첫 체험 수업을 하고 나서 난 정말 내 몸을 내가 이렇게 바르게 세울 수 있다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 알게 된 것 마냥 신기했다.
그렇게 나는 필라테스라는 운동을 시작했다. 20살 때 취미로 배웠던 재즈댄스 이후 처음 시작하는 운동이었다. 내 몸이 변화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 느꼈고 나는 아주 빠른 속도로 필라테스에 빠져들었다. 진짜 회사를 다니면서 운동할 시간이 나에게 날까?라고 생각한 게 무색하게도 난 일주일에 4회 이상 필라테스 센터에 운동을 하러 나갔다. 1년 이상을 그렇게 필라테스라는 운동의 매력에 푹 빠져서 지내다 보니 나이 마흔이 가까운 나이에 꿈이 생겼다. 필라테스 강사가 되고 싶었다. 나처럼 내 몸을 제대로 못 쓰는 사람들에게 내 몸의 주도권을 찾아주고 싶은 포부가 생겼다. 늦은 감이 있지만 나에게 장래 희망이 생겼다. 불행하게도 나는 내 꿈을 좇기에 이미 나이가 많았다. 정말 속상한 점은 이 생각이 내 생각이 아니라는 것이다. 난 늦지 않았다고 생각을 했는데 주변사람들은 모두 너무 늦은 게 아니냐고 했다. 심지어 잘 다니고 있는 대기업을 그만두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냐는 것이었다. 또 너무나도 슬프게도 그 많은 사람들 중에는 내 남편도 있었다. 내 편이 되어주리라 생각했던 남편은 말 그대로 남의 편이었다.
드라마 대사에서 말한 것처럼 눈뜨고 있는 모든 시간이 노동이었던 그 당시 나는 우리의 생활에 많은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무언가 많이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고 꿈을 꾸며 사는 것 그건 비단 나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내 가족들이 항상 꿈을 꿨으면 했고 항상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으면 했고 그 꿈을 항상 말로 표현하고 이루며 살았으며 했다. 100세 시대라고는 하지만 젊고 건강한 시기는 정말 금방 없어질 것만 같았다. 남은 인생은 남들도 그렇게 살아의 남들처럼 이 아니라 나처럼 살고 싶었다. 그래서 남편에게 우리 좀 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보자고 말했다. 경제적인 부담도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살아있는 것을 느끼며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난 내가 그리고 남편이 서로를 위한다는 명목아래 하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살고 싶지 않았다. 어찌 보면 충분히 걱정이 될 수 있는 부분 있다. 어쨌든 생계가 달려있었으니 말이다.
어찌 되었건 월급쟁이의 이점은 내가 일을 뛰어나게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매달 월급이 따박따박 나오지 않는가? 월급쟁이는 크게 두 가지 부류가 있는 것 같다. 모든 일을 열심히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9to6 시간만 채우고 가는 월급루팡. 그중에 나는 전자에 속했다.
나는 공항에서 탑승수속 업무, 출입국 업무, 수하물 업무, 외항사 지원업무, 전세기 업무 등 거의 모든 부분의 업무가 가능한 올라운드 직원이었다. 심지어 퇴사하기 전 최근 5년은 직무강사로 일을 하며 거의 5년 동안 인천공항 탑승수속파트로 전입 오는 직원들의 대부분은 내가 교육을 했을 정도였다. 나 또한 내 일에 대한 프라이드는 높았다. 하지만 일이 너무 힘들었다. 성격상 대충이라는 것을 몰랐고 항상 에너지를 바닥까지 끌어내가며 일을 해서 항상 퇴근 사인이 남과 동시에 나의 에너지는 완전히 방전이 되었다. 그렇다 보니 내 생활은 어땠겠는가? 그 힘들다는 육아, 살림? 당연히 손도 못 댔다. 살기 위해서 일을 하는 게 아닌 일을 하기 사는 사람 같았다. 내가 힘들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넌 일찍 퇴근하잖아. 그럼 시간이 많은 거 아니야?”
“넌 평일에 쉬니깐 좋겠다.”
난 일찍 퇴근하지만 일찍 퇴근하기 위해서는 늦어도 새벽 3시 반에는 일어나야 한다. 나도 똑같이 주 5일 근무를 한다. 평일에 쉬는 거? 혈혈단신 나 혼자 살 때는 좋았다. 홀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근데 결혼과 출산 이후는 말이 달라진다. 주말에 출근할 때마다 아이들은 누구에게 맡겨야 하나 걱정이었다. 그 와중에 남편의 일터가 지방으로 바뀌면서 홀로 회사를 다니며 어린 두 아이를 감당해야 하는 2년. 어느 하나 실수하면 아슬아슬하게 이어가던 생활의 끈이 끊어질 것 같은 하루하루는 나를 더욱 지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