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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정 Jun 27. 2024

18년 동안 다닌 항공사를 그만두고 지금은 백수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

잠들기 위해 눈을 감으면서도 다음날 눈뜨면서 해야 하는 모든 일들을 계속 생각했고, 눈을 뜸과 동시에 모든 초당 해야 하는 일들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눈 뜨고 있는 모든 시간 동안 다음 할 일은? 또 다음 할 일은? 하나라도 놓치면 무너질 것만 같은 시간이 2년이 넘게 지속되었다. 2년이 지난 뒤 남편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지만 난 이미 지칠 대로 지쳐 모든 상황들이 스트레스였다. 결국 나는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고 우울증 약을 먹기 시작했다. 처음 병원을 가게 된 계기는 PMS(월경 전 증후군)때문이었다. 나는 PMS로 월경시작 전후로 보름씩 즉, 한 달 내내 가슴통증을 몇 년 동안 달고 살았다. 그 몇 년 동안은 사실 인지하지도 못했었다. 신경 써야 할 다른 일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내가 움직이면서 내 팔에 부딪힐 때조차 너무 아파서 통증을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그 통증이 우울증으로 인한 건지 몰랐다. 솔직히 호르몬의 불균형. 그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통증은 약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약을 먹고 통증은 금세 사라졌다. 하지만 주변 환경이 바뀌지 않는다는 건 결국 스트레스는 다시 쌓인 다는 것이다.


내가 처음 남편에게

"나 우울증이래. 병원 다니고 있어."라고 말했을 때 남편은 적잖이 놀랐다.

남편의 첫마디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왜? 잘 지내고 있었잖아." 


남편은 내가 아무런 불만사항들을 말하지 않고 지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정말 많이 서운했다. 내가 불편하다고 힘들다고 말을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들에 지쳤고, 결국 내가 선택한 방법은 입을 다무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싫은 것도 좋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하기 싫은 것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안으로 삼켰고 결국은 병이 난 것이다. 나는 6개월 정도 상담을 다니고 병원 다니는 것을 그만뒀다. 괜찮아져서 그만 다닌 게 아니었고, 아무리 상담을 받아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그냥 내가 버티든가 때려치우든가 둘 중에 하나 밖에 방법이 없었다.


2020년 코로나19로 인해서 공항 업무는 180도 바뀌게 되었다. 처음에는 공항을 이용하는 승객들이 급격히 줄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일하는 게 힘들지 않았다. 오전 피크타임에만 만 명이 넘는 승객들이 몰려오다 부킹이 절반이상 뚝 떨어졌으니 한가롭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곧 공항은 비상업무체제에 돌입했고 코로나로 인해서 한 달의 반은 무급으로 쉬어야 했다. 그로 인해 수입은 절반이상이 줄어들게 되었다. 당장 다음 달에 나의 근무스케줄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시간을 계속 이어가게 되었다. 이렇게 공항 현장 근무 인력의 반이상을 줄였다. 비행 편이 한 시간에 한 플라이트씩 배정이 되었다면 그래도 참 감사했을 것이다. 빈익빈 부익부라고 했던가?

슬프게도 비행 편들은 몰릴 때는 동시간대에 서너 비행편들이 몰려서 출발을 했고, 없을 때는 몇 시간씩 비행 편이 없어서 직원들의 업무를 하지 않는 공백이 생긴 것이다. 바쁜 시간대는 어쩔 수 없이 적은 인력으로 업무에 투입을 시켜도 어떻게든 지연 없이 비행기를 출발시킬 수 있다. 물론 그 짧은 시간 동안 직원들의 업무 강도나 피로도는 장난이 아니지만. 하지만 아무리 힘들었어도 관리자들의 입장에서는 직원들 나머지 시간 동안 그냥 쉬라고 할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나온 가장 만만한 방법이 직원교육이다.


여러 명의 강사가 있었지만, 무급 혹은 유급 휴직으로 근무기간 중에 강사들이 함께 일하는 날이 잘 없다. 결국 나는 그 바쁜 피크타임에 고강도 업무를 마치고 그 이후에는 직무교육이라는 업무를 수행해야만 했다. 그뿐이었겠는가? 그 와중에 매달 오는 전입직원들 교육까지 진행을 하다 보니 매일매일이 강행군이었다. 심지어 휴직기간 중에 다른 강사들과 함께 쓸 교육할 교육자료까지 만들어야 했다. 절대 내 인생에 나머지 근무는 없다.라고 생각했는데 부킹이 역대급으로 줄어든 이 시기에도 나는 퇴근 후 근무와 휴직 혹은 쉬는 시간 업무까지 하고 있었다. 간절하게 워라밸이 필요했었고, 그때 나는 다시 한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주제로 남편과 싸움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 필라테스 강사 자격증을 딸래. 지금은 휴직기간도 있으니 지금이 아니면 내가 학원을 다닐 수 없을 것 같아."

"안 그래도 지금 수입이 줄어서 힘든데 꼭 지금 그걸 해야겠어?"


내가 하고 싶은 일에 관한 이야기했을 때 남편은 불만을 드러냈다. 대기업에 취직해서 18년 동안 나오는 월급 따박따박 받아서 지내왔기에 나도 절대 내가 다른 직업을 가지고 싶으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계속 이렇게 산다고 생각하니 밝은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다. 좀 부끄럽긴 하지만 난 그 당시 큰 꿈을 꿨었다. 필라테스 강사로 아주 큰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우리 가족은 시간적으로 아주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꿈을 꿨는데 남편은 내가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걸 못해서 삐졌다고만 생각을 하더라.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깐 난 왜 그때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을까?


맞아! 나 하고 싶은 거 하고 살래!라고. 결국 나는 완벽한 합의가 아닌 나의 철없는 투정으로 필라테스 강사 자격증을 얻게 되었다. 자격증을 따고 나서도 간간히 대강 수업만 나가면서 나는 1년 정도 회사를 더 다녔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회사를 그만두는 용기가 아주 조금 부족했었다. 새롭게 일할 필라테스 센터에 정식으로 취직을 하고 나서야 회사를 그만둘 수 있었다. 새로 다니는 필라테스 센터는 즐거웠다. 하루에 적게는 4시간 많게는 7시간 정도 일을 했다. 물론 회사에서 받는 월급에는 한참 못 미쳤지만, 내 시간이 있다는 것을 결혼 이후 처음 느끼게 되었다.


시간이 생기게 되니 계획이라는 걸 세울 수 있게 된다. 매주 주말마다 쉴 수 있는 것도 정말 달콤한 일이었다. 공휴일에 명절 연휴에 모두 다 쉴 수 있는 것도 정말 신기했다. 필라테스 센터는 오후에 일을 해서 오전 시간대가 온전히 비어서 운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아무 걱정 없이 하루에 2시간 혹은 3시간 정도는 오롯이 나를 위해서 운동할 수 있는 시간이 정말 달콤했다. 1년 정도 오전은 운동 오후는 수업이라는 루틴으로 생활을 했고, 1년 정도 되었을 때 난 다니던 필라테스 센터를 그만두었다. 지역적인 특성상 퇴근 시간대에 서울로 출근하는 나는 엄청난 교통체증을 이겨내야 했다. 눈이 오거나 비가 오는 날에는 더욱 심했다. 결국 나는 러시아워를 이겨내지 못했다. 40세가 넘은 나이에 퇴사와 이직과 퇴사. 예전의 나라면 정말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은 꾹 참으며 만성피로와 동거동락하며 계속 그 삶을 이어 나갔을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풍족한 생활을 하는 건 아니지만 크게 바뀐 게 있다면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다는 용기가 생겼고 언젠가 해낼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백수지만 난 계속 도전하고 있는 중이다.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서 난 계속하고 싶은 일에 도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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