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니나 Jul 03. 2024

이제 주인공 말고 엑스트라 할래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위한 깨달음

아침에 내린 커피는 계절을 타지 않고 언제나 향긋하다. 며칠 전 심리 상담을 받았던 내용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가만히 식탁 의자에 앉아 커피잔을 바라봤다. 내가 나에게 거는 기대라는 건 실로 어마어마했다. 무슨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유명하고 훌륭한 사람이 언젠가는 될 거라는 믿음이 너무나 강했다. 그것이 잘못이었을까? 요즘 들어 자꾸만 어릴 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보곤 한다. 그때도 적당히 행복했던 것 같은데, 아무리 떠올려도 지금처럼 편안하고 행복했던 순간이 기억나지 않는다.


몇 년 전 독일에 놀러 온 친구에게 갑작스러운 고해성사를 한 적이 있다. 


"나는 내가 주인공으로 태어난 줄 알았어. 그런데 그럴 깜냥이 되지도 않는 엑스트라에 불과했지. 근데 말이야, 그게 나를 이토록 편안하게 만들어줘. 난 그냥 다시는 주인공을 꿈꾸지 않는 채로 이 삶에 만족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내게 주인공이라느니, 엑스트라라느니 하는 말들은 그저 그런 상징에 불과하다. 누구나 자기 인생의 주인공은 본인이라는 닳고 닳은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 류의 주인공을 말하는 게 아니다. 가끔 인기 있는 상업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꿈을 향해 쉬지 않고 달려가 결국은 해내고야 마는 그런 집념의 아이콘들 말이다. 인디 영화나 예술 영화에 나오는 방황하는 안쓰러운 영혼 말고. 마치 주인공에게만 허락되는 성취라는 것이 있는 것처럼 세상의 일인자들은 모두 주인공 같기만 하다.


친구는 잠시 놀란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별다른 대답은 없었다. 한국에서 10년이나 집착하며 했던 연극 생활에 내 마음이 많이 다쳤었다는 것을 나는 친구에게 한 번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내 주변 사람들은 가끔 내가 연극을 계속했더라면 지금쯤은 더 좋은 결과가 있었지 않았겠느냐는 식의 안타까운 말들을 흘리곤 했기 때문에 잠시 불안해졌다. 그렇지만 그냥 별다른 설명 없이도 내 마음을 충분히 알아챈 것이었을까. 침묵 속에서 나는 마음이 이해받았다는 느낌이 들어 안도했다.


그렇게 그때의 대화를 다시 되새김질해보고 있었는데 어떤 의심이 생겼다. 예전에 어떤 철학과 심리학을 버무린 책에서, 사람은 목표한 바를 이루지 못하면 원래부터 그다지 원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자신을 위로한다고 했던 내용이 기억났다. 잠시 목이 타 커피를 급히 몇 모금 마시며 생각을 정리해보기 시작했다. 설마, 나도 그런 것일까? 주인공이 되지 못해서 엑스트라에 만족해버리려는 것일까? 만약 내가 정말 어릴 때 꿈꿨던 굉장히 유명하고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낼 수 있다면, 나는 받아들이지 않을까? 누구도 읽지 못하는 내 마음을 나는 살금살금 거짓말을 점검해가며 최대한 솔직해지려 애써본다. 친구에게 이해를 받았다 하더라도 내가 스스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면 모두 소용없는 일이 되기 때문에, 나는 나를 위해 최대한 조심스럽고 침착하게 나의 마음을 더듬어 갔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리고 되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런 욕심을 가지고 사는 삶 자체가 괴로운 것이다. 드디어 나는 욕심과 분리되어 그 어떤 번민이나 고통이 찾아오지 않도록 편안한 상태에 머무른 것이고, 필요 이상으로 오늘의 행복을 미래를 위해 투자하지 않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아무런 목표가 없고 계획이 없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 아직도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며 성실하게 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 고통으로 다가올 정도로는 나를 괴롭히지 않는 것이다. 이 곤란스러운 마음이 얼마나 많은 상처와 아픔을 바탕으로 했는지 내가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나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일어섰다. 


하루에 밥 두 끼, 커피는 세 잔, 한 달에 한 번 와인을 먹을 정도로만 돈을 벌 수 있으면 나머지 시간에는 책만 읽으면서 살아도 충분한 것 아닌가. 누군가는 아주 소소하고 평범한 삶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사실 인류 전체로 보면 엄청 럭셔리한 삶이지 않을까. 모두가 주인공일 필요는 없고, 그게 꼭 나일 필요도 없다. 그저 있는지도 모르는 작은 엑스트라인 채로, 커피나 맛있게 마시고 책이나 재미있게 읽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쩌면, 어렸던 내게 이런 삶이 가장 좋다고 말한다면 지금의 내게 미쳤다는 소리를 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너의 꿈을 포기할 수 있느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모습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사실 오래 걸렸다. 이런 삶이 내게 가장 잘 어울린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


나는 여전히 밝고 에너지가 넘치며, 긍정적으로 많은 꿈을 안고 살아간다. 그렇지만 어릴 때의 나처럼 맹목적으로 열정적인 사람 역할은 그만하고 싶다. 지금 이런 나의 상태에 포기나 좌절, 실패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기로 한다.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위한 깨달음을 얻은 것뿐이므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