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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석 Dec 04. 2021

현지인이 길을 물어요, 현지어로

저 한쿡ㅅㅏㄹ람... 인데요..

올 상반기에 바리스타 자격증 수업을 들었다. 워낙에 커피를 좋아하기도 하고 에스프레소를 직접 내려보고 싶기도 했다. 그냥 한 번 해보고 싶었다. 유럽이나 남미 촌구석 카페의 낡아빠진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내리는 커피에 대한 막연한 로망이랄까, 영화에 나올 법한 그런 이미지가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나처럼 별 생각 없이 취미 삼아 등록하는 한량도 있지만, 아무래도 자격증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향후 바리스타로서의 커리어나 카페 창업을 염두에 두고 학원을 찾는다. 내가 등록했던 수업에도 다양한 연령대의 예비 바리스타와 예비 카페 사장님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중국 교포도 있었다. 몇 주간에 걸친 수업이 막바지에 이르면 자격증 시험을 대비한 자체 실습을 반복한다.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우유 거품을 내고, 뽀얀 거품을 갓 내린 에스프레소에 아름답게 안착시키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하루는 설거지를 마치고 잠시 쉬는데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다가오더니 나에게 묻는다. 


"한국에 오신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나는 카톡에 한자 이름을 병기한다. 카톡 이름에 굳이 한자를 적는 게 누군가에겐 재수없어 보일 수도 있겠다만, 무언가 조금이라도 있어 보이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한자 이름을 사용해도 되는 곳에는 가급적 많이 적어두라는 어머니의 바람 - 딱히 미신을 신봉하시는 건 아닌데 이런 데 관심이 많으시다 - 을 적극 수용하였을 따름이다. 성명학적인 관점에 따르면 내 이름이 많이 불리고 많이 보이는 것이, 특히 한자 이름이 많이 노출되는 게 좋다고 한다. 어쨌든 뭐라도 좋은 일이 생기면 나쁠 거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 브런치에도 본명을 쓸 걸 그랬나?


바리스타 선생님은 이 카톡명을 보고 오해를 한 모양이다. 마침 같은 반에 중국 교포도 있고,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교포 혹은 한국어 구사가 어느 정도 가능한 외국인 학생들도 제법 있는 듯 했다. 그러니 카톡명에 한자를 새긴 중국인 또는 조선족이 한국에서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한 뒤 취업을 하거나 조그만 카페를 열 생각이구나 짐작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 보통의 한국인이라면 누가 카톡명에 한자를 병기하겠나. 나조차 나 이외에는 그런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 최근에 처음으로 한 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그 분은 대만에서 유학하고 서울 여의도 모처에서 중국어 강의를 담당한 경력이 있는 '중국통'이다.


"한국에 오신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네? 저 한국인인데요..."


약 3초간 흐르는 정적... 선생님은 자신이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는지 많이 당황한 낌새였다. 나 역시 살짝 당황스럽긴 했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웃으며 상황을 풀었다. 아니 내가 뭐.. 외국인으로 오해받은 게 어디 한두 번이어야지. 까무잡잡한 피부에 금세 자라나는 수염 덕분에 나를 현지인이나 외국인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해외 어디를 가나 일단 동아시아 사람이다 싶으면 니하오를 뱉고 보는 양놈들이 많은데, 내 경우는 그런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실상 그 스펙트럼도 매우 넓고 다양해서 피부가 평소보다 덜 타면 일본인, 살짝 타면 라티노, 많이 타면 아랍이나 동남아 사람으로 변신이 가능하다. 그야말로 자유자재, 카멜레온이라 불러다오.




태국에 살 때는 이런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나서 내가 정말 태국인이 되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관광객들이 영어로 길을 물어볼 때는 그러려니 했다. 내가 현지인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어쩌면 그들의 입장에서는 내가 관광객이라면 원하는 답을 더 수월하게 얻을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심지어 한국인이 내게 영어로 길을 물어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누가 들어도 이건 100% 토종 한국인이구나 싶은 억양으로 "카오산이 어디냐" 묻지만, 그래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여긴 조선땅이 아니니까. 


그런데 현지인이 나에게 길을 묻는다? 이건 완전히 다른 양상이다. 아침 출근길에 횡단보도를 건너려는데 옆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지만 어째 나에게 뭔가를 물어보는 느낌이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웬 타이 남성이 나에게 뭐라고 한다. 아무래도 방향을 묻는 것 같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나에게 길을 묻는 것이 분명하다. 태국어로. 하... 이건 좀 심하잖아. 물론 내가 지금.. 누가 봐도 여행자라고는 할 수 없는 일상적인 출근 복장 - 와이셔츠에 정장 바지 - 을 착용하고 있다고는 해도 말이야, 여긴 일하는 외국인도 많은 곳이라고, 그런데 나한테 태국어로 길을 묻는다고? 


심지어 택시를 타고 가는데 기사가 나에게 태국어로 대화를 시도하려 한 적도 있다. 간단한 몇 마디 이상의 영어 대화가 가능한 택시기사는 거의 없기 때문에 보통 "어디어디 가주세요"하고 행선지만 태국어로 이야기하고 나면 도착할 때까지 그와 나 사이 대화는 단절되게 마련인데, 아주 가끔씩 뭐라뭐라 이야기를 이어가는 기사들이 있다. 분명히 그 택시 안에는 기사와 나 이외에 다른 사람은 타지 않았기 때문에, 택시기사가 영혼과 교감하는 심령술사나 퇴마사가 아니라면 바로 옆에 앉은 승객과 대화를 하려는 게 틀림없다. 태국어로.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어색하게 미소를 띤 채 기사를 바라보는 것뿐이다. "나는 태국어를 못해요" 또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라는 문장을 태국어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두어 번 발생하고 나자 - 한 번도 아니고!!! - 나는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고 태국어 문장을 암기했다. "나는 태국어를 못해요".


백번 양보해서 여기까지는 가볍게 웃고 넘어갈 만 하다. 절대 다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일지라도 이런 경험을 나만 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이 정도는 솔직히 외국에서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수많은 해프닝 중 일부에 불과하다. 야, 내가 말이야, 어디에 있을 때는 이런 일도 있었어! 라며 적당히 포장하면 멋진 무용담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만약 그 무대가 한국이라면? 아.. 이건 또 이야기가 달라진다. 


태국에서 귀국하던 날이었다. 인천공항에 내려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기 전 물어볼 것이 있어 1층 입국장 중앙에 있는 인포를 찾았다. 캐리어를 끌고 인포 앞으로 가서 입을 떼기도 전에, 직원이 매우 친절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Can I help you?" 순간 말문이 턱, 나는 고뇌에 빠졌다. 이거 뭐지? 지금 이 여자가 나를 한국인으로 보지 않는 거지? 여기 한국인데? 음, 아닌가, 내가 아직 태국에 있나, 사실은 내가 비행기에서 내린 게 아니라 이제 타려는 거였나? 아냐 여기 한국 맞아, 인천공항이야.. 그럼 나는 영어로 대답해야 하는 건가? 그건 이상하잖아. 그럼 한국어로 대답해야 하는 건가?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영어로 대답하면 진짜 이상하잖아... 1초의 시간은 영겁처럼 흘렀다.


이 때만 해도 내가 오랜 해외 체류를 마치고 갓 귀국해서 그런 줄만 알았다. 정말로 그런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한 2주 정도 지났을까,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 - 아직 머나먼 남쪽 나라의 피부톤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 - 에 어머니 출국 배웅차 함께 인천공항에 갔다. 당시는 탑승권 자동발급기가 막 도입되어 운영되기 시작할 즈음이라 항공사별로 도우미 직원들이 발급기 앞에서 승객들의 발권을 도와주고 있었다. 내가 어머니보다 한두 걸음 정도 앞서서 기계로 다가가는데 직원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완전 똑똑히 들었다. "Can I see your passport?" 그리고 내가 뒤따라오는 어머니를 향해 뒤로 돌아서는 순간, 직원도 어머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말했다. 나는 이번에도 명쾌하고 확실하게 들었다. 거짓이나 악의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선량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여권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그래요, 그렇군요.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후에도 나는 어디를 가든 현지인 대접을 받았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 항공을 타게 되어도 승무원들은 나에게 늘 영어로 물었다. 기내식 메뉴는 무엇으로 드릴까요, 음료는 어떻게 준비해드릴까요, 불편하신 건 없으신가요. 그래서 나도 포기했다. 


코로나 이후 2년. 내가 비행기를 타지 않은 지도 2년이 넘었다. 그 전부터 한국에 머무른 시간을 거슬러 따져보면 벌써 제법 시간이 흘렀으니 이제는 내 동남아물, 아랍물도 많이 빠지지 않았을까. 내 피부도 조금은 하얗게 되었을 것 같다. 다음 번에 해외에 나가게 되면 승무원들이 어떤 언어로 말을 걸어올지, 현지인들은 내게 길을 묻는지, 그렇다면 그들의 말로 물을 것인지...


정말, 궁금하... 아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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