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럽게 운수 좋은 날
2년만에 영국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전날 밤 미리 일주일치 짐을 대강 챙겨두었건만, 언제나 출국 당일에는 꼭 뭔가 빼먹은 게 있기 마련이다. 샤워를 하고 짐을 마저 꾸리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출발이 지연되었다는 항공사의 문자였다.
운이 좋은 하루라고 생각했다. 늦잠을 잔 탓에 아침 먹을 시간이 없었다. 일단 공항에서 출국수속을 마친 후 간단히 때울 요량이었다. 에어프랑스는 잦은 파업과 딜레이로 유명하다. 올해만 벌써 세 번째던가,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메일로 파업 소식을 알려왔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항공편이 줄어들 거야, 하지만 우리는 승객들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 노력할게, 'Inconvenience'를 일으켜 미안하다, 는 메세지는 실상, 우리는 항상 그렇듯 우리가 가장 우선이니까 너희가 좀 불편해도 어쩔 수가 없어, 딱히 미안하지도 않지만 사과는 할게, 제대로 운항되지 않을 에어프랑스를 기다리든지, 아쉬우면 다른 항공사도 많으니까 알아서 하든지, 라는 일방적 통보나 진배없다. 프랑스인 특유의, 개인주의랍시고 포장한 이기주의. 유럽이나 미국 사람들이 대체로 이런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야, 니네는 정말 좀 심해. 잘 씻지도 않는 더러운 놈들이 찬란한 문화와 예술 운운하며 고상한 척이나 하고 말이야.
솔직히 말해 이런 이유로 항공편을 예약하고 결제 버튼을 누르기 직전까지 고민을 거듭했다. 에어프랑스는 가급적 피하고 싶은 선택지였다. 하지만 다른 여지가 없었다. 아름다운 지중해를 끼고 있는 카르타고의 도시 튀니스에서 산업혁명의 본고장이자 축구에 미친 맨체스터로 향하는 직항은 없었다. 나에겐 두 가지 옵션이 있었다. 튀니스에어를 이용해 런던으로 날아간 후 히드로 공항에서 지하철을 한참 타고 시내까지 나온 다음 유스턴역에서 다시 기차에 몸을 싣고 2시간 정도를 더 갈 것인가, 아니면 에어프랑스에 탑승하여 파리 샤를드골에서 한 번 환승할 것인가. 두 번의 탑승은 곧 두 번의 결항 내지는 딜레이의 리스크를 의미했지만, 복잡하기로 소문난 히드로에서 언더그라운드를 거쳐 다시 기차를 타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보였다. 그래, 무슨 일이야 있겠어. 장거리도 아닌 데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있는 구간이니 어떻게든 되겠지.
어쨌거나 게으른 '유럽의 중국인들' 덕분에 아침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여유롭게 식사와 설거지까지 마치고 보니 메세지가 하나 더 와 있다. 또 한 차례의 딜레이. 어이구, 어련하시겠어요. 그렇게 12시 40분 튀니스발 파리행 비행기는 2시 30분까지 밀렸.. 아니, 잠깐만, 이게 이렇게 밀린다고? 그럼 파리에서 맨체스터 가는 비행기를 탈 수 있나? 튀니스에서 파리까지는 약 2시간 반, 그럼 샤를드골 도착하면 5시 정도 된다는 건데, 파리에서 뜨는 비행기가 5시 반 즈음이니까 최소 20분 전에는 탑승해야 한다 치면 잘해봐야 일이십분.. 적어도 튀니스에서 딜레이된 예정시각에만 출발하면 어떻게든 겨우 맞출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갑자기 똥줄이 타기 시작한다. 일단 빨리 공항에 가봐야겠다. 출국수속을 할 때 환승편 티켓까지 받으니까 항공사에서 연계가 가능하다고 판단한다면 티켓을 내주겠지.
튀니스 카르타지 공항은 한산했다. 몇 년 동안 테러가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탓에 여전히 공항 출입 보안검색은 빡센 편이지만 이것조차 살다 보니 익숙해진다. 에어프랑스를 찾아 짐을 부치고 수속을 했다. 그런데 나의 일정을 보던 직원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안돼, 설마. 그녀는 파리에서 출발하는 맨체스터행 항공기를 탈 수 없다고 말했다. 지금 딜레이된 비행기를 타게 되면 시간을 맞출 수가 없다며.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그럼 어떻게 하면 되니? 다음 비행기를 타란다. 다행히 오늘 밤 파리에서 출발하는 비행기가 한 대 더 있었다. 휴, 그래, 근데 이 비행기는 왜 계속 딜레이가 되는 거야? 'Maintenance' 문제가 있단다. 늘 이런 식이다. 그놈의 정비. 됐고, 오늘 안에 갈 수 있다니 그 정도면 되었다.
게이트 앞에서 비행기를 기다린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Boarding 사인이 뜨지 않는다. 시간은 벌써 3시. 이미 딜레이된 출발 예정시각을 넘겼다.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이런 상황에서는 여유롭게 책을 읽으며 기다릴 수도 없다. 그런데 갑자기 화면이 바뀌더니, 17시로 또 딜레이. 뭐라고?
째깍, 째깍. 시간은 이제 3시를 지나 4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원래 12시 40분 다음에 4시쯤 튀니스-파리 비행편이 또 있었다. 젠장, 이걸로 예약할 걸, 이 비행기가 먼저 뜨겠네. 여기 좀 태워주면 안 되나? 파리에서 맨체스터로 가는 밤 비행기는 8시 55분. 이걸 타려면 늦어도 파리에 8시에는 도착해야 하고, 그럼 아무리 늦어도 5시 반에는 튀니스를 떠야 한다. 5시에는 출발하겠지, 에이 설마... 설마 그때까지 못 고치지는 않겠지?
초조하게 왔다갔다 하면서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항공사 직원이 공항 시큐리티를 대동한 채 나타났다. 그리고 프랑스어로 뭐라 지껄인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튀니지는 언어는 물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여전히 식민 모국의 영향 아래 있다. 사무실을 벗어나면 영어를 사용할 수 없었던 탓에 - 심지어 공항이나 호텔에서마저! - 이 곳에서 사는 내내 고생했다. 튀니지 자체가 이런 환경인데 하필이면 항공사도 에어프랑스... 안그래도 언어 부심 쩌는 인간들인데 여기서 영어를 할 리가 없다. 먹고 살기 위한 최소한의 생존불어만을 체득한 나로서는 - 좌회전이요, 우회전이요, 여기서 내려주세요, 스테이크 미디움 소금은 빼구요, 계산이요, 얼마예요, 비싸요 - 1도 알아듣지 못한 채 모니터와 직원을 번갈아 노려볼 따름이었다.
어째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던 승객 중 일부가 모여들기 시작한다. 아, 4시 비행기를 태워주려나보다! 언어가 제대로 통하지 않는 환경에 살다 보면 늘어나는 거라곤 눈치뿐이다. 곧 각자의 사정을 이야기하며 하나둘 티켓을 받아들기 시작한다. 나 역시 최초 출발시간보다 3시간이 넘게 기다리고 있는 (준)난민으로서 나의 억울한 상황과, 특히 파리에서 환승해야 하는 절박함을 한껏 어필했다. 물론, 영어로.
그 빌어먹을 자식은 내가 프랑스어를 하지 못한다는 걸 인지하자마자 내 이야기를 듣는 대신 주변의 다른 불어 구사 능력자들에게 티켓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정말 알아듣지 못하는 건지, 알아듣지 못하는 척을 하는 건지, 확인할 방도는 없었다. 멀고 먼 동아시아에서 왔으며 신사인 척 하는 섬나라의 언어를 구사하는 한 남자의 호소는 그렇게 철저히 무시당했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말이 통해야 화를 내든 항의를 하든 제발 태워달라고 빌든 뭐라도 할 게 아닌가. 속수무책으로 멍 때리고 있는 사이 몇 안 되는 빈 자리는 모두 채워지고 말았다.
인샬라. 이제는 언제 뜰지 기약조차 없는 비행기가 제발 더 늦어지지만 말아달라고 알라를 찾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4시 반을 넘긴 시계가 5시를 향해 내처 달리는 동안에도 비행기에 탑승하라는 안내가 나오지 않는다. 점점 불안해졌다. 공항에서 이렇게 하루 다 버리는 거, 다 괜찮으니까, 제발 오늘 안에만 가자. 제발, 플리즈, 실부쁠레. 그러나 쌀쌀맞고 인정머리라곤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시간은 이내 5시를 지나치고야 만다. 기다림에 지쳐 넉다운이 되어서야 전광판 화면이 바뀌면서 Boarding 사인이 떴다.
어렵사리 비행기 안에 자리를 잡고서도 또 한참을 대기해야만 했다. 6시가 넘어서야 항공기는 활주로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이미 한참 전에 패닉을 넘어 반 포기 상태였지만, 그러면서도 마음 한 켠에서는 기적을 바랐다. 내리자마자 미친 듯이 뛰면 또 몰라.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해서 빨리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비행 시간 내내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비행기가 갑자기 초음속으로 프랑스를 종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간식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좌불안석한 끝에 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새 9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이 비행기도 딜레이되었을 수도 있잖아. 에어프랑스, 하던 대로 해! 그렇게 부질 없는 희망의 불씨를 안은 채 비행기는 공항 청사에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맞은편에서는 탑승교가 천천히 앞문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그 때, 왼편 창가 너머로 정지해 있던 항공기의 후진이 눈에 들어왔다. 곧 이륙하려는 모양이었다. 뒤로 물러서는 비행기 너머 공항 건물 외벽에 알파벳 대문자가 보였다. 항공기의 목적지인가보네, 어디로 가는 걸까, "MAN", 응?
운명의 장난일까. 기적은 없었다. 아니, 그저 기적이 없었다고만 하면 차라리 낫다. 이건 짓궂어도 너무 짓궂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이건 꿈인가? 아니면 나를 놀리는 건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지만 분명 꿈은 아니었다. 하필 바로 옆에서 출발하려는 비행기가 맨체스터행일 건 뭔가, 내가 갈아타야만 하는 바로 그 비행기일 이유는 뭐냐고.
아포칼립스를 눈앞에서 보고도 나는 환승 탑승구로 향했다. 너무나 비현실적인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리고 굳게 닫혀버린 게이트를 보고서야 오늘 벌어진 일의 결말을 받아들였다. 나는 오늘 맨체스터에 가지 못한다. 예정대로라면 이미 영국에 도착해서 시내로 들어가 짐을 풀고 늦은 저녁을 먹고 있을 시간이었다. 환승게이트 사이 데스크로 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다행히도 여기는 프국에서 가장 큰 국제공항이었기에 브리튼 섬 오랑캐의 언어로도 나의 처지를 이해시킬 수 있었다. 큰이모뻘 되어 보이던 직원 아주머니는 대수롭지 않게 오늘 묵어야 할 호텔과 내일 아침 항공편을 안내해주었다. 갈 곳을 잃은 여행객들을 한두 번 맞아본 솜씨가 아니었다. 전쟁영웅이자 전직 대통령의 이름을 딴 공항 근처에는 나처럼 밤 비행기 연결편을 놓친 사람들을 위한 비즈니스 호텔이 여럿 있었다. 새벽 비행기와 오전 10시 비행기 중 고르라기에 나는 주저 없이 후자를 택했다. 너무나 지쳐 있었고 굳이 여기까지 흘러온 마당에 새벽 댓바람부터 다시 공항으로 가야 할 이유는 없었다.
짐을 찾은 후 공항 밖으로 나가 셔틀을 타고 호텔로 향했다. 체크인을 하고 방에 들어가니 어느새 자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맨체스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형에게는 - 친형은 아니고 - 연락도 해주지 못했다. 튀니스에서 출발하기 전 상황을 설명하긴 했으나 정말 비행기를 놓치고 파리에서 하루를 머물게 될 줄은 몰랐다. 공항에서는 무료 와이파이가 잡히지 않았다.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와이파이를 연결하고 작금의 황당한 상황을 전달했다. 원래는 형네서 하루 자고 다음 날 아침에 다른 지인들과 웨일스로 여행을 가기로 한 터였다. 형은 아예 내일 오전에 공항으로 픽업을 나오겠다고 했다. 그냥 다같이 바로 출발하는 게 낫겠다고.
지난 하루를 복기해봤다. 딜레이, 또 딜레이, 다시 한 번의 딜레이, 그 사이 후발 비행기가 먼저 출발, 공항에서 6시간 가까이 머문 끝에 겨우 아프리카를 떠나 유럽으로 넘어왔다. 그러나 눈앞에서 환승 항공편을 놓치고 지금은 웬 좁디좁은 호텔방에 들어와 있다. 공짜라고 좋아해야 하나?
여유부릴 시간은 없다. 빨리 자고 바로 공항으로 다시 나가야 한다. 간단히 조식을 챙길 시간 정도는 있을 것 같으니 다행이다.
헛웃음이 났다. 더럽게 운수 좋은 날이로구만. 그러나 다음 날이 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왜 못했을까.
젠장, 아직 끝이 아니었다.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