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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석 Sep 07. 2021

샤를 드골의 미아

길을 잃다.

공항에는 아침부터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좋다, 이 무질서함. 이곳만이 갖는 특유의 분위기. 공항 출입이 잦아지다 보면 비행기에 탑승한다는 행위는 고속버스나 KTX에 타는 것과 비슷해진다. 달리 말하면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출발 두세 시간 전에 공항에 간 적이 언제였던가. 면세쇼핑에도 관심이 없어 적당히 체크인 마감 전에 맞춰 가곤 하던 내가 - 이건 일정 부분 너무 편하고, 너무 빠르고, 너무 쾌적한 인천공항 탓이다 - 오늘 조금 일찍 나온 건 어젯밤 호텔을 안내해주던 빠리지앵 마담이 마지막에 덧붙인 한 마디 때문이었다. "아침에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 일찍 나가는 게 좋을 거야."


사람이 많아 봐야 얼마나 많겠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 평소보다 조금만 빨리 갈까. 지난 밤 작은 방이 복도마다 빽빽하게 들어찬 비즈니스 호텔에 들어오며 몇 시간이나 잠들 수 있을지 헤아렸다. 좁아터진 샤워실에서 뜨거운 물로 피곤에 절은 육신을 녹인 다음, 불편하지 않은 잠자리를 위한 과학적인 최소 사이즈란 게 있다면 바로 이런 침대가 아닐까 싶은 싱글베드에 곯아떨어졌다. 아침잠이라곤 둘째 가라면 서러울 나지만 이른 시간부터 공항에 나가야 하는 날이면 조식까지 챙겨먹으며 부지런을 떨기도 한다. 블랙커피 한 잔을 쪼르륵 따라서 자리에 앉아 밤새 눅눅해진 혈관에 카페인을 흘려보낸다. 몸에 감돌던 옅은 긴장이 풀리는 게 느껴진다. 


공항에 도착해 체크인까지 마쳤는데도 아직 출발 예정시각까지는 한 시간도 넘게 남았다. 뭐야, 마담. 별 거 아니잖아. 출국수속 대기줄로 이동하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아직 9시도 되지 않았는데 이 줄은 뭐지? 티켓을 손에 쥔 채 줄 끝머리에 자리를 잡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출국심사대를 몇 개 안 열어두었다. 10개가 넘는 라인 중 열려 있는 건 달랑 3개. 프랑스 놈들은 출근도 안 하나? 


문제는 체크인이 아니라 출국수속이었다. 마담의 '경고'를 곧이 듣지 않은 나는 다소 당황했지만,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아있었기에 걱정은 접어두고 호젓하게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줄이 줄어드는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더뎠던 탓에 조금씩 조바심이 났다. 시간이 갈수록 텍스트에 집중할 수 없었다. 눈으로는 글자를 좇았으되 정신은 내 앞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수를 헤아리기 바빴다. 결국 책을 덮고 출국심사대와 시계를 번갈아 보며 발을 동동거리기 시작했다. 앞선 사람들의 수가 줄어드는 속도와 보딩 마감까지 남은 시간을 비교해봤을 때, 위험했다. 하지만 딱 맞춰 탈 수는 있을 것도 같았다. 


마침내 순서가 돌아왔다. 수속은 순식간에 끝났다. 도장이 찍힌 여권을 받아들고 보안검색대로 향하며 모니터를 보는데... 빨간 글자로 깜빡깜빡하는 "FINAL CALL". 눈을 꿈뻑꿈뻑, 다시 보고 또 봐도 파이널 콜... 네? 그제서야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빛의 속도로 보안검색대를 통과했다. 그리고 게이트 상황을 보려고 다시 모니터를 보는 순간, 나는 내 앞에 놓인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CLOSED".


게이트로 내달렸다. 몇 분 걸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정리하는 직원조차 없었다. 이미 문 닫고 다 가버렸다는 뜻이다. 에어프랑스 맞아? 왜 이럴 때만 제 시간에 칼같이 가는 거지? 10분, 아니 5분만 늦게 닫았어도 탔을 텐데. 그렇게 허구헌날 딜레이되다가? 어제는 내가 몇 시간을 기다렸는데? 나는 패닉에 휩싸였다. 이런 일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처음이야 정말. 


진짜야 처음이야 진짜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지금? 야, 설마, 말도 안 돼, 이렇게 또 놓친다고? 장난하지 마라 진짜, 너무 심하잖아. 하지만 현실은 현실. 나는 어젯밤에 비행기를 놓치고, 오늘 아침에 또 놓쳤다. 멘탈이 박살이 날 것 같다.


다음 비행기라도 타야지. 정신줄을 완전히 놓기 직전 내면의 목소리가 날 붙잡았다. 흩날리는 멘탈자락을 가까스로 붙잡고 안내데스크를 찾았다. 내가 비행기를 놓쳤어. 친절하게 내 비행기록을 검색하던 마드무아젤이 말한다. 너 원래 어제 가는 거 아니었어? 맞아, 맞는데.. 어제는 이래이래 해서 못 타고 티켓을 받았는데 오늘은 저래저래 해서 이렇게 됐네? 음 근데 어젠 그렇다 치고 방금은 네가 잘못해서 놓친 거지? .... 그렇지, 그런 셈이지. 그런 거라면 다른 티켓을 줄 수 없어, 사야 돼. 그리고 다음 비행기가 12시인데, 보자.. 자리가 없어. 3시 거 타. 


현재 시각 10시. 꼼짝없이 또 공항에 갇혀 있게 생겼다. 계획대로라면 어제 저녁 7시쯤에는 맨체스터에 도착했을 텐데 이대로라면 오후 4시가 되어서야 영국 땅에 발을 디딜 수 있다는 이야기. 거의 만 하루 차이다. 어제 튀니스에서 12시 40분에 출발하는 비행기였으니, 튀니스에서 맨체스터 가는데 대략 27시간이 걸린 셈이다. 27시간... 27시간... 서울에서 파리를 왕복하고도 남는 시간이다. 그나마 어떻게 하다 보니 운 좋게 티켓을 공짜로 받기는 했지만, 딱히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엄청난 자괴감이 몰려왔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내가 왜 어젯밤 마담의 경고를 무시했지? 아 조금 더 빨리 나올 걸. 밥을 먹지 말 걸. 그깟 조식이 뭐라고. 괜히 커피 한 잔 하면서 여유부린답시고 이게 뭐람. 아 출국수속 줄에서 사정 이야기하고 좀 먼저 수속 받을 걸. 


그러게, 왜 나는 출국수속 대기줄에서 한 시간 내내 기다리기만 했을까. 처음 30~40분 정도야 그저 줄이 빠르게 짧아지기만을 바라며 상황을 주시할 수 있다 쳐도, 사람들의 수가 극적으로 줄어들 리는 없는 상태에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실제로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지하지 못한 것도 아니면서, 나는 왜 끝까지 공항 직원이나 앞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을까? 가볍게 지나쳤던 의문을 진지하게 곱씹어본 건 그 날로부터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나는 "Excuse me"를 연신 외쳐대는 상황을 겪고 싶지 않았다. 공항 특성 상 직원의 도움을 받더라도 라인에서 빠져 나와 한 번에 추월해갈 방법은 없었으므로, 남은 줄의 길이를 감안할 때 '최소' 20~30번은 반복했어야 했다. 물론 이 자체로 대단한 민폐이자 고역이다. 공항 직원이나 여행객 중 누군가가 나를 제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도 나를 보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견딜 수 없었다. 비행기 시간에 늦어 허둥지둥 자신을 밀치고 지나가는 동양 남자를 바라보는 눈초리가 어떨지 상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나는 개념이라곤 밥 말아먹은 동양인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거다. 비행기를 놓치게 되는 리스크가 현실이 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었지만, 실제로 게이트가 닫히기까지는 여전히 시간이 있었다. 내 눈 앞에서 벌어지기 전에는 발생하지 않을 리스크였다. 어떻게든 타기만 하면 장땡이다. 그러나 내가 무개념 동아시아인이 되는 리스크는 "Excuse me"를 단 한 번이라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바로 현실이 된다. 나는 그게 싫었던 거다. 


그러나 얼핏 문화적이며 인종적인 인식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법한 이 행동의 기저에는, 미움받고 싶지 않은 내가 있다. 나는 내 남은 생애 동안 두 번 다시는 볼 일 없을 익명의 무수한 외국인들에게 찐따 같은 동양인이 되는 게 상상만으로도 너무나 끔찍했나 보다. 몇 초만 지나면 나라는 사람을 잊고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휴대폰으로 시선을 거두어 갈 그들에게, 그 몇 초 동안 미움 받을 용기가 나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대신 실현될 수도 있지만 실현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고 무엇보다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고 마음 속으로 믿었던, 이틀 동안 두 대의 비행기를 연이어 놓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현실이 되었다. 




샤를 드골의 미아는 터미널을 정처 없이 헤매었다. 공항이란 할 게 많으면서도 할 게 없는 곳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분주한 공간이기도 하다. 버스 정류장, 지하철역, 기차역, 그리고 공항까지, 무질서의 정도와 속도는 교통 수단의 규모에 비례하여 증가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에 3시간 이상 머물지 않지만 어쩌다 그 이상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면 바삐 움직이던 몸과 마음은 급격하게 공허해진다. 건너편에 앉아 있던 사람이 자신의 게이트로 향하고, 그가 떠난 자리를 채우던 사람 역시 자신의 비행기를 찾아 떠난다. 반대쪽 벤치에 누워서 긴 시간을 대기하던 또 다른 사람, 나와 비슷한 처지라 생각하며 묘한 동질감과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하던 사람마저도 공항의 안내방송이 끝나기 무섭게 짐을 챙겨 달아나버린다. 


문득 외로움이 밀려든다. 모두가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는, 영원할 것처럼 강건하면서도 '일시적인' 공간에서 갈 곳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 정신없이 빡빡한 일상이 곧 그 사람의 가치를 입증한다고 여겨지는 세상에서 순간 나는 쓸모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것도 오직 나만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어떻게든 '연결'되려 애쓴다. 와이파이를 찾아 헤매고, 카톡을 확인하고, 페이스북에 접속한다. 전 세계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지구상의 다른 도시들과 가장 잘 '연결'되어 있는 공간에서 나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지 않기 위해 일정 시간 동안만 허락되는 무료 와이파이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해야만 한다. 시차를 계산하여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갈 곳을 잃은 나의 시간을 채운다. 그러다 어느덧 나의 비행기가 모니터에 뜰 때쯤 되고 나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다. 


길게만 느껴지는 여정의 매 순간 나는 나와 만난다. 외롭고 연약하며, 때로는 그것을 감추기 위한 허세를 부리는 어린아이 같은 나. 길 잃은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짧은 비행을 마치고 입국 수속을 밟는다. 도장이 찍힌 여권을 들고 세상 밖으로 나가면 마치 어른이 되기라도 할 것처럼.




맥락 상 앞선 글과 이어지기에 링크를 걸어둡니다. 하지만 이전 글을 읽지 않아도 무방한 독립적인 글을 썼습니다. 아래 링크한 글은 읽으셔도, 읽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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