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카이의 시 속에서처럼 저녁노을에 박쥐가 퍼덕거리는 숲을 지나서 오솔길을 한없이 걸어가다가 길목에 있는 선술집에 들어가 어린 포도주와 파란 호두를 먹고 죽음 속으로 비틀거리며 들어가 버리기에 꼭 적합한 계절.’ 그 계절이, 전혜린에게 가혹했던 그 계절이 돌아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쏟아지듯 부여된 자유로움에 어쩔 줄 몰라하던 시절,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여러 종류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러던 중, 눈길을 끄는 제목의 책 하나를 발견했다. 늦은 가을 벤치에 앉아 두껍지 않던 그녀의 책을 단숨에 읽었다. 존재의 병을 앓고 있던 그녀가 나의 심연 속으로 성큼 들어왔다. 공감이라는 이름으로 삶에 대한 그 작가의 고뇌가 소름 끼치게 느껴졌다. 암울한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홀로 유학하게 되면서 그녀의 외로움은 깊어만 갔다. 정작 그녀가 좋아하는 계절은 겨울이었다. 몸에 밴 고독과 함께 가을이 주는 냉기로 이 계절을 무서워한다고까지 했다. 지독한 가을병을 견디고 나서 그전의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삶에 대한 열정 덕분이었다. 젊은 나이에 비극적으로 떠났어도 전혜린의 삶은 불꽃같았다. 괴테의 파우스트처럼 순간에 열중하며 삶을 낭비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살았던 것만을 분명했으리라.
아직도 생각나는 추억이 있다. 석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일 때 대학교 근처에 살던 친구를 불러내었다. 싸늘한 공기를 느끼며 낙엽 쌓인 교정을 하염없이 걸었다. ‘목마와 숙녀’를 읊다가 감정이 북받쳐 엉엉 울기도 했다. 순수한 마음으로 더욱 친해진 우리는 몇 년 동안 전혜린식 가을 앓이를 겪으며 빛나는 시절을 함께 보냈다.
가을을 좋아하고 전혜린을 알게 되었는지, 전혜린을 알고 가을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 이후 가을만 되면 한동안 이 계절과 전혜린에 취해 살았다. 그녀의 영향으로 철학 관련 과목 몇 개를 이수할 정도였다. 나 역시 지독하게 가을을 앓고 난 다음에야 단지 그 계절이 우울의 빛이 아닌 ‘침묵으로 대답하고 잊어버림으로써 기억’할 수 있게 하는 아주 고차원의 계절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 후 직장을 다니면서 한동안 나만의 가을 의식도 치렀다. 남의 시선에는 아랑곳없이 거리의 낙엽을 쓸어 담아 차 안에 싣고 다녔다. 몇 주가 지나면 낙엽의 향은 온데간데없고 말라서 바스러진 잎 때문에 먼지 나는 차 안을 온종일 청소해야 했다. 그 당시 지인들은 나를 4차원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나 싶다. 또한, 해마다 낙엽을 주워 책 속에 보관하는 의식도 오랫동안 해왔다. 처치 곤란으로 보기 흉한 잎들을 정리하면서 이 계절에 너무 집착하는 거 아니냐고 스스로 반문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을이 주는 우울한 빛깔을 침잠시키는 법도 알았다. 한없이 뾰족했던 원초적인 감성도 내 곁에서 다소 둥글어져 갔다. 기다리면서도 두려워했던 그 계절은 이제 추억을 곱씹는 소중한 계절이 되었다.
매 순간 가을이다. 지금 창밖은 낙엽과 갈색의 시간을 꿈꾸고 있다. 이브 몽탕의 목소리와 함께 낙엽이 날리던 영화 한 장면이 펼쳐질 것도 같다. 아아, 깊어간다는 말이 어울리는 계절, 정말이지 그저 떨어지는 낙엽이 되고픈 그런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