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일기 14. 수의사는 다 도둑놈이야
다이어트 중 잠시 쉬어가기로 외전 격인 일기를 하나 씁니다. 바로 고양이 병원비!
한국에서 고양이 전문 병원은 은근 드문 편이다. 정말 병원 방문이 어려운 소동물 보호자가 들으면 배부른 소리라고 하겠지만 강아지에 비해 고양이만의 특성을 알아주고 진료하는 병원을 만나려면 손품을 꽤 팔아야 한다.
유명한 남수의사가 인터뷰에서 자신이 수의대 학부생일 땐 소동물(햄스터 등)보다 고양이 비중이 더 낮았기 때문에 요즘이 놀랍다고 한 적도 있다. 당연히 나도 이사갈 때마다 항상 해당 지역의 고양이 전문 병원을 물색하는데 오랜 시간을 보냈다.
이 분야에서 선도를 달리는 모 유명 동물병원이 소송과 내용증명을 난사하는 곳이라 그런지 병원마다 모니터링이 꽤 집요하여 인터넷에서 동물병원 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난이도가 높은 일이다. 고양이 보호자끼리 오프라인에서 만나면 그동안 발설할 수 없었던 동물병원 정보 수다로 시간이 가는 줄 모를 정도다. 당근마켓 동네 게시판이든 네이버 카페든 어딘가의 고양이 커뮤니티에선 항상 꾸준하게 동물병원을 추천해달라는 글이 올라온다.
그런데 추천을 요청하는 글엔 항상 '양심 병원'이 거론된다. 양심 병원이 대체 뭐길래?
"아시안 모부는 누구보다도 자식이 의사가 되길 바라면서, 절대 의사를 믿지 않고 병원에 가지 않는 집단이다." 넷플릭스에서 스탠드업을 진행하던 한 아시안계 남자가 한 말이다. 대중이 전문가를 어떻게 대하는지 핵심을 꿰뚫은 문장이었다.
한국인도 당연히 어지간하면 병원에 가지 않고 의사의 말을 신뢰하지 않으며 엉뚱한 곳에만 돈을 쓰기 일쑤다. 제발 병원에 가서 의사 말을 들으라며 홧병이 나도록 모부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아도 그들은 병원에 잘 가지 않는다. 6년의 대학과정을 수료하고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거쳐 약 10년 이상 수련한 전문가가 진단을 내리고 진료비를 받는 행위는 생명을 가지고 장사하는,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광경인 듯 하다.
자신은 이성적인 사람이라 절대 의사에게 속지 않는다고 자부하며 지난주 아침 방송에 나온 아로니아 원액을 구입해 들이키고 콜라겐을 먹는다. 아니, 요즘 유행은 타트체리였던가? 무엇인진 몰라도 조만간 문제점이 밝혀져서 다음 유행으로 갈아타질 제품이다.
의사는 모두 도둑놈이야!
여기서 해당 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가 나온다. "양심 의사", "양심 병원". 여기서 의미하는 '양심'을 통역하자면 '자신이 상상한 금액보다 적은 치료비가 나왔다'는 뜻이다. 당연히 상상보다 치료비가 많이 나왔다면 그건 '과잉 진료'이자 '비양심 진료'이다.
빈약한 상상 속 진료비는 굉장히 헐값이므로 촘촘한 양심 테스트에 오늘도 의사 대부분이 걸러진다. 이쯤되면 누가 양심을 잃었고 누가 도둑놈인지 헷갈리는 판이다. 모두가 도끼눈을 하고 의사를 노려볼 때 살길을 도모하기 위해 애써 '양심 선언'을 하며 다른 의사가 하는 진료는 다 과잉 진료라고 함께 손가락질하는 의사가 생기기도 했다.
동물병원은 사람 병원에 비해 이런 현상이 더 심해 아래 세대까지 내려와있다.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과 같은 건강보험 혜택이 없기 때문이다. 비슷한 진료를 받아도 체감 가격이 더 비싸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동물병원에 가지 않고 인터넷에 글을 쓴다. 고양이가 이렇게 저렇게 아픈데 병원에 가야할까요? 고양이가 한 달째 설사를 하고 있어요. 친절하고 양심적인 병원, 과잉진료 안 하는 전문 병원 좀 추천해주세요.
(진료비를 내 생각보다 더 많이 받으면 전부 생명을 볼모로 바가지를 씌우는 파렴치한 수의사인 거니까 눈탱이 맞지 않게 싼 병원 추천해주세요, 라고 적지는 않겠지만.)
'추천할만한 동물병원'이란 무엇일까? '양심적'이어서 진료비가 싼 병원? 봉사 정신이 투철하고 생명을 사랑하여 길고양이 구조를 하면 할인해주는 병원? 직원이 친절하여 긴장된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병원? 모두가 동물병원의 핵심 기능을 조금씩 잊고 있었다.
동물병원은 고양이를 진료하는 곳이며 아픈 고양이의 원인을 밝혀 적절한 치료를 진행해 고양이를 낫도록 돕는 기능이 제일 중요하다. 정확한 진단과 치료가 우선이지 비용과 친절은 순위가 다르다.
가격을 '합리적으로' 제시한다는 동물병원 가격비교 소셜커머스 플랫폼을 가라고 추천하는 사람도 제법 많다. 수컷 불임 수술을 고작 몇 만원에 할 수 있다면서. 그런데 '내'가 수술을 받는다고 가정하면 가격 경쟁을 하는 병원에 가고 싶을까.
한국에서 수술 비용 경쟁이 무척 심한 라식 수술을 예로 들어 생각해본다. 비의료인이 쓰는 과정이니 아래 문단은 틀린 부분이 있어도 가볍게 웃으면서 읽었으면 좋겠다.
가격 경쟁을 하려면 어디선가는 돈을 아끼고 알뜰하게 지출을 줄여야 한다. 먼저 병원이 입지하는 부동산 비용을 줄여 저기 구석으로 이사가볼까. 여기까지는 괜찮은 것 같고. 새 장비를 들이지 않고 오래된 장비를 오래도록 아껴서 사용하면 비용이 더 줄 것이다. 새로운 기능이 생겼거나 성능이 개선되었다는 최신 의료 장비는 실력으로 메꾸기로 하자. 소모품도 자잘하게 은근 비용이 나가니 여기서도 줄여본다. 비싼 소모품보다는 저가 소모품을 쓴다. (그래도 설마 가품을 사용하거나 재활용을 하진 않겠지?)
이제 남은 것은 인건비다. 경험이 많고 근사한 경력을 지닌 전문가는 비싸니 적당한 가격 수준에 맞는 적당한 의사를 채용한다. 인건비 비중을 줄이기 위해 하루에 더 많은 수술을 시키면 어떨까. 하루에 수술을 몇 건씩 많이많이 진행하면 젊고 싼 인력이 경험도 늘고 좋겠지..
병원 환경과 의료 장비, 의료 소모품, 인건비,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알뜰해지는지 나는 모르니까 환장할 일이다. 내가 나열한 사례는 모두 기사로 한 번 이상 발견된 사례이다. 고양이 TNR(길고양이 불임수술 및 방사) 사업에 참여하며 몇만원 안팎의 저렴한 불임 수술과 집고양이 용으로 제대로 진행된 불임 수술을 둘 다 겪어본 사람은 이해가 쉬울지도 모른다. 불임 수술 비용을 아끼겠다고 마취 전 혈액검사를 생략하는걸 볼 때마다 혀를 내두르게 된다.
한 가지 무서운 예시를 들어본다. 파이와 스프가 앓고 있는 만성신부전(CKD)과 유사한 확률(30%)로 고양이가 흔하게 앓는 질병이 또 있다. 원인 모를 증상으로 치아가 녹아내려 입안 통증이 심해지는 '치아흡수성병변(FORL)'이다.
평소 양치질을 게을리 하지 않고 꾸준히 하며 잇몸과 치아를 유심히 관찰하는 보호자라면 염증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지만, 확실한 치료법이 존재하지 않아 대부분 어느 정도 버티다가 상황에 따라 '발치 수술'을 진행한다. 고양이 구내염도 때에 따라 발치 수술을 진행하니 발치는 중한 수술이면서 생각보다는 흔한 수술이다. 당장 20년 11월에 임보를 시작한 '홍시'라는 고양이도 구내염으로 전체 발치를 진행한 고양이다.
고양이는 턱뼈가 약해 발치 수술이 까다롭고 치아 전체를 발치하는 경우엔 하루에 1건을 초과하여 진행하는 것도 부담스럽다. 치아 통증으로 밥을 제대로 먹지 못 해 컨디션이 심하게 저하된 고양이를 장시간 마취하는 것도 섬세한 전문 인력이 요구되는 일이다. 치아 엑스레이 등 치과 전용 장비도 따로 필요하고 입원처치도 필요해 병원 규모도 일정 수준 이상이어야 한다.
가격이 어느정도 나갈 수 밖에 없는 고양이 발치 수술 비용을 아껴보도록 하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치아 엑스레이를 찍어 확인하고 이를 하나씩 골라서 뽑는건 비싸고 어려운 일이니까 그냥 턱뼈를 들어내 턱을 통으로 잘라낸다. 충격적이지만 실제로 꾸준하게 일어났던 일이다. 2020년에도 한 고양이 카페에서 그런 진단을 받았다는 글이 올라온 것을 확인했다.
턱뼈를 자르는 곳은 어쨌든 치과전문병원 전발치 수술에 비해 저렴할 것이다. 비싼 수술을 권하지 않고 더 적은 비용으로 통증을 해결했으니 '양심적'이다. 만족할 수 있을까?
농담이 아니고 턱뼈 제거를 선택한 병원은 다음에 나올 병원에 비해서는 '양심적'인 병원이다. 없어진 치아와 잇몸은 말썽을 부리지 못 할 테니 당장의 치료는 끝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유명한 고양이 치과 전문병원에는 다른 병원에서 발치 수술을 받고도 증상이 호전되지 않아 2차 수술을 진행하는 까다로운 환묘가 자주 들어온다.
그런 고양이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수술비를 절감(인건비 등)하기 위해 치아를 뽑지 말고 위에 보이는 부분만 부러뜨리거나 갈아서 안 보이게 만든 다음 고양이 보호자에게 다 뽑았다고 거짓말을 치는 병원을 만난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절대 증상이 호전되지 않으며 고양이는 끔찍한 치통에 시달리다가 전문병원에서 곱절로 힘든 재수술을 받아야만 나을 수 있다.
치아 엑스레이는 전문 장비가 따로 필요한데다 마취도 해야 하기 때문에 보통 검사 비용만 10-11만원 안팎이 들어간다. 수술이 모두 끝나고 이가 제대로 다 뽑혔는지 엑스레이를 찍어 검증하는 데에만 10만원을 쓰느니 그냥 넘어가길 선택한다면 함정에 제대로 걸릴 수도 있다.
그럼 여기에 쓰는 10만원은 바가지일까? 아닐까? 생략해도 되는걸까?
2차 수술과 병원 선택과 관련된 한 치과전문병원의 블로그 글. 수술 사진이 그대로 있으니 클릭 전 주의.
진짜 구내염수술전문병원 판별법(고양이 구내염 전문병원)
https://blog.naver.com/highdah/221142885742
(글에 나온 똑똑이는 길고양이로 만성구내염 환묘라 전발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아픈 아이를 포획하여 길냥이를 할인해준다는 저렴한 병원에 가서 부분발치를 진행했고, 해당 병원에서는 치아를 뽑지 않고 갈아서 눈에 안 보이게 만들어주었다. 결국 구내염은 가라앉지 않았고 똑똑이는 고생하다 전문병원에 내원해 3시간 반이 넘는 수술시간을 버티며 재수술을 받아야 했다. 두 번의 수술비를 낸 셈이다.)
여기까지 끔찍한 사례를 보고나면 당연히 큰 수술엔 적절한 비용을 낼거고 평상시에 들어가는 덜 중한 진료비를 아끼려는 것이었다고 한 걸음 물러나는 분도 계실 것이다. 그러면 고양이를 기르면서 일년에 한 번쯤은 꼭 가야하는 고양이 건강검진이라면 어떨까.
고양이 건강검진을 하는 이유는 질병을 조기에 발견하기 위함이다. 다양한 만성질환들은 증상이 나타난 경우엔 이미 늦었을 때가 많다. 돌이킬 수 없이 늦고 아프기 전에 조금이라도 조기에 질환을 발견하고 예방하기 위한 비용. 건강검진 비용 또한 잠재적으로 어떤 질환이든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덜 중하다고 말할 수 없는 돈이다.
어떤 것이 과잉 진료고 어떤 것이 정당한 진료(^^;)인지 나는 그 기준을 의사소통으로 꼽고 싶다. 수의사는 전문가로서 어떤 검사가 왜 필요한지 보호자가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보호자는 수의사가 하는 말을 적극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하고 공부를 해두어야 한다. 서로 의사소통이 충분히 되어 해당 검사가 왜 필요한지 합의가 이루어져야 돈을 지불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건강검진 플랜을 짠다고 가정해본다. 고양이는 어떤 질환을 갖고 있을 지 모르기 때문에 수의사는 한정된 예산 내에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검사를 시행하며 가성비를 따지게 된다. 우선 내가 건강검진에서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필수 검사는 신체검사(이빨, 귀, 눈 등 육안으로 상태를 점검하기), 엑스레이, 복부초음파, 혈액검사, 소변검사(요스틱 등)다.
이를 바탕으로 조금씩 고양이의 상황에 맞는 검사를 추가해 나간다. 나이가 좀 더 있거나 심장과 관련된 유전병이 있는 품종묘의 경우에는 ProBNP와 심장초음파를 더 본다거나, 신장질환을 신경쓰는 사람이면 SDMA 검사도 한번쯤 봐두면 좋다. 만일 길에서 구조된 고양이라면 기생충 등이 있는지 분변검사를 해보고 전염병과 관련된 몇 가지 키트검사를 권할 수 있다.
심장사상충 키트검사나 혈액형 검사 등은 필수가 아닌 검사에 가깝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무의미한 바가지 검사라고 할 순 없다. 수의사와 조율하며 보호자가 판단을 내려야 한다. 최근 해당 지역에 심장사상충을 지닌 모기가 출몰하고 있으며 집에 모기가 많은 경우에는 심사충 검사를 해보자고 수의사가 권할 수도 있고, 헌혈이나 수혈이 필요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보호자가 미리 혈액형 검사를 요구할 수도 있다.
무슨 검사인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을 잘 해주지 않거나, 별다른 설명 없이 임의대로 톡소플라즈마 검사 따위 현재 상황과 상관이 없을 확률이 매우 높은 불필요한 검사를 한다면 수의사에게 적극적으로 설명을 요구하면 된다. 만일 그 이후에도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면 병원을 바꾸는 것을 추천한다.
하지만 그걸 알아보고 요구할 수 있으려면? 공부가 선행되어야 한다.
동물병원비가 정확히 어떤 식으로 구성되는지 잘 모르겠고, 영수증 항목을 봐도 이것이 필요한 검사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는데 내 기대보다 진료비가 많이 나왔다면 과잉진료에 당한 것이 아니라 그냥 본인이 공부를 안 한 것에 가깝다.
사람처럼 자신이 느끼는 증상을 말로 설명하지 못 하는 동물의 경우는 검사 가짓수가 늘 수 밖에 없다. 특히나 만성질환은 더욱 그렇다. 대강의 검진비용을 잘 모르는 보호자가 평상시에 건강검진을 꾸준히 잘 해와서 자료가 쌓였을리도 만무하다. 이전 검진기록이 거의 없는 동물을 진료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검사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왜 이런 설명을 자꾸 하고 있느냐. 검사비용을 공부하지도 납득하지도 않으려 하면서 과잉진료라고 호통만 치는 보호자 때문에 내가 힘들기 때문이다. 필요한 검사비용을 적극적으로 낼 생각인데도 검사비용을 물을 때마다 묘하게 위축되는 기분이 든다. 게다가 검사비용을 궁금해하는 순간 수의사는 혹시 과잉진료를 걱정하는 보호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극적으로 진료를 하려고 한다. 나는 그냥 금액을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렇게 소극적인 진료로 '착한 병원'이라 소문난 병원 때문에 고생하는 보호자도 여럿을 보았다. 고양이 일기 6편에서는 파이와 스프가 만성신부전을 진단받게 된 날을 적었었다. 이 때 수의사는 기본 혈액검사를 한 다음 크레아티닌 수치가 아주 조금 높아 정상일 수도 있지만 찜찜한 마음이 드니 SDMA검사를 추가할 것을 권했다.
필수 검사가 아닌데 고양이 두마리에게 갑자기 14만원을 더 내게 생겼으니 과잉진료라고 부를 수 있을 법 하다. 하지만 해당 검사로 나는 고양이 신부전과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었고 이후 수의사는 더 필요한 검사를 추가해 신부전 초기라는 진단을 이끌어냈다. 이 지출은 필요한 지출이었다.
만일 혈액검사상 넘어갈 수도 있는 작은 수치를 수의사가 보고도 돈이 더 들어갈까봐 조용히 묵인했더라면, 내가 해당 검사비용을 납득하지 못 하고 젊고 건강한 고양이니까 돈을 아끼려고 했더라면 신장이 아프다는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상황이 훨씬 악화되고나서야 땅을 치며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를 한 네이버 카페에서 읽었다. 과잉 진료를 안 하기로 유명하고 평이 좋은 동물병원에 가서 건강검진을 했는데 신부전을 일찍 발견하지 못 했다는 글이었다. 첫 번째 건강검진에서 신장 수치가 조금 안 좋네요, 하고 수의사가 그냥 넘어가길래 자신도 대수롭지 않은 문제인 줄 알았는데 반년 뒤 피부가 안 좋아서 건강검진을 또 받았더니 신부전 4기 판정을 받았다는 글.
그제야 지난 검사를 돌아보니 이전 검사에서도 대략 신부전 2기 수준이었다는 내용을 읽으니 마음이 아팠다. 심지어 보호자가 신부전 말기에는 빈혈도 생기곤 하는데 빈혈 상태는 어떤지 묻자 그제야 빈혈 검사도 해볼까요? 안그래도 귀가 창백하던데,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절대 먼저 권유하지 않고 보호자가 일일히 요구해야만 그제야 검사를 해주는 병원이었다. 댓글에는 해당 병원에서 비슷한 사례를 겪었다는 보호자들이 여러 명 있었다. 인터넷에서도 불안한 요인이 있어 특정 검사를 추가하고 싶어도 수의사가 굳이 하지 말라며 검사를 만류하고 과잉 진료 걱정을 한다는 후기가 차고 넘친다.
그 병원들은 왜 그렇게 '대충' 진료를 보게 되었을까? 평을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저기에 가면 병원비가 적게 나온다는, 양심적이고 착한 병원이라는 평을 꿋꿋하게 유지하고 싶어서 그렇게 소극적으로 변해버렸다. 병원의 기능을 잃어버린 병원이었다. 나는 그런 '착한 병원'을 만나 소극적 진료를 받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항상 새로운 병원에 가면 긴장을 바짝 해야 한다.
그.래.서. 모두에게 병원비 내역을 알아듣고 요구할 수 있는 보호자가 되자고 말하고 다닌다. 1차적으로는 당연히 의무를 다하지 못 한 수의사 잘못이다. 하지만 수의사가 방어적으로 행동하도록 만드는 한국 보호자 다수의 분위기가 아무 영향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수의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기 위해서는 보호자도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한다. 수의사가 낸 소견을 종합하여 이해하고 판단을 내릴 줄도 알아야 한다.
덧붙여 내가 소극적이지 않고 마음껏 요구하려면 병원비를 수납할 때 떳떳할 수 있도록(따흑...) 저축을 해야 한다. 차세대 육묘 유행템은 며칠 반짝 갖고노는 로봇 장난감이 아닌 저축 상품과 고양이 전문 도서가 되길 바란다.
그래도 여기에서 끝나면 아쉽다. 수의사와 검사 항목을 뜯어보며 의사소통으로 검사 플랜을 짜는 방법 이외에도 병원비를 조금이라도 아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고양이를 평소에 유심히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이다. 보호자가 최대한 고양이를 관찰하고 평소 알고있는 정보를 종합, 정리하여 수의사를 도와 선택지를 같이 줄이면 된다.
구토하는 고양이를 예시로 들어볼까. 고양이 구토는 못해도 수백, 수천가지가 넘는 원인이 있다. 단순히 밥을 빨리 먹어서 일회성으로 토하는 아주 가벼운 문제에서부터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급한 응급 상황, 더이상 치료법이 없는 최악의 질환까지 무엇이든 가능하다. 인터넷에서 고양이가 왜 구토하냐고 백날 질문글을 올려봐야 정보값이 있는 답변을 듣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먼저 수의사는 자신의 임상경험을 토대로 고양이를 관찰해 최대한 흔한 순서대로 확률을 계산하여 필요한 검사를 나열할 것이다. 검사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심각한 상황이 아니라면 우선은 대증적인 처방만 간단하게 해주고 며칠간 해결되지 않으면 다시 찾아오라고 할 수도 있다. 구토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보호자는 적극적으로 평소 고양이를 관찰해온 정보를 넘겨야 한다.
고양이가 구토하기 전 후로 나타낸 행동은 무엇이었는지, 구토는 어땠는지, 구토의 색상, 점도, 냄새, 형태는 어땠는지(사진으로 자세하게 찍어두면 좋다), 구토는 어느 정도 지속되었는지, 구토하고 난 이후 활력은 어땠는지, 밥은 잘 먹는지, 주로 먹는 밥은 무엇인지, 배변/배뇨 상황은 어떤지, 앓고 있는 병은 없는지, 먹고 있는 약/영양제는 없는지, 이전 병력이나 과거에 비슷한 일은 없었는지, 고양이의 평소 습관(이식증 등)은 어떤지, 최근에 특별히 달라진 점(새로운 간식 등)은 없는지, 최근에 다른 병원에서 검사를 한 자료는 없는지, 선택지를 줄이기 위해 넘길 수 있는 정보가 무척 많다.
무엇이 진료에 필요한 정보인지 잘 모르겠으면 그냥 다 넘기면 된다. 수의사가 알아서 선택하고 종합할 것이다.
인터넷에서 이 증상을 보이면 이게 문제라던데요, 하고 알아서 구글 진단을 내리라는 의미는 아니다. 진단은 전문가가 내리되 보호자는 곁에서 정보를 제공하며 도움을 주는 정도면 충분하다. 평소 고양이가 물건을 자꾸 뜯어먹거나 이전에도 비슷한 일로 이물을 삼켜 병원에 내원한 일이 있다면 해당 정보를 알려 어디에 집중할지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이렇게 기록하고 관찰한 정보가 없어 답변할 수 있는게 거의 없다면 수의사는 백지상태에서 모든 가능성을 짚어볼 수 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검사 비용이 올라간다. 그리고 쓸데없이 엑스레이를 찍고 피를 뽑았다며 욕을 먹는다. 자녀 육아에 제대로 참여해본 적이 한번도 없는 허수애비가 영수증만 보고 뒤늦게 무슨 분유 값이 이렇게 비싸냐고 호통치는 꼴이다.
검사 결과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돈을 버린 것이 아니라 여기는 문제가 없을 확률이 높다는 정보를 산 것이다. 놓친 부분은 없는지 항상 검사와 처치를 더 요청하는 나는 늘 묻고 싶었다. '과잉 진료'란 무엇인지. '착한 병원'은 무엇인지. 그리고 의료비 최저가 경쟁은 환자와 보호자에게 좋기만 한 일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