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은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에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입적했다.
서방정토 어딘가에서 스님과 길상화 보살이 해후한다. 보살은 지금의 길상사인 요정 대원각을 스님에게 시주했다. 보살은 삼배를 올리고 스님은 합장으로 답배한다.
보살이 먼저 스님에게 말을 꺼낸다.
“스님, 어찌 그런 유언을 남기셨습니까? 세상이 스님 책 절판 얘기로 소란스럽습니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너도 나도 스님 책을 찾느라 야단법석입니다. 한쪽에서는 책을 웃돈을 얻어 사고파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지고 있지요. 제가 너무도 좋아했던 『무소유』는 초판본이라고 백만 원까지 뛰었답니다.”
스님이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하자 보살이 말을 이었다.
“전생에 남긴 글과 말이 그리 허물로 다가왔습니까? 전생의 업을 끊고자 했던 스님의 바람은 이뤄지기 어려울 듯합니다. 사람들은 있던 책들을 모양만 바꾸거나 스님의 글을 짜깁기해서 낸다고 하네요. 어떤 이들은 자신의 글에 스님의 법명이나 ‘무소유’ 같은 책 이름을 넣는 꼼수까지 쓴다고 합니다.”
스님은 입맛을 다실 뿐 말이 없다. 보살은 한숨을 쉬며 말을 덧붙인다.
“한술 더 떠서 스님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앞장서야 할 ‘맑고향기롭게’에서도 책을 2권이나 출간했습니다. 스님의 상좌 중 맏이이었던 덕조 스님도 묵은 원고를 책으로 냈다고 하니 점입가경이 되었습니다.”
한참을 말이 없던 스님이 입을 열었다.
“절판은 저의 글과 말로 지은 구업(口業)의 고리를 끊기 위한 고육책이었습니다. 이미 세상에 저질러놓은 책들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구태여 새로 책을 찍어내 업을 이어갈 수는 없지요.”
보살이 난감해하며 말을 받는다.
“구업이라니요? 스님께서 거짓된 글을 쓰셨습니까, 미사여구로 말을 꾸며 사람들을 현혹했습니까? 이간질하는 글로 해를 끼친 적도 없고 사악한 글을 쓰신 적도 없잖습니까?”
스님은 합장을 하며 구업을 정화하는 진언을 읊는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길상존이시여, 길상존이시여, 지극한 길상존이시여 원만히 성취하소서). 저의 글에 탐진치(貪嗔癡)의 허물이 티끌만큼도 없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보살께서 시주하신 절의 이름을 길상(吉祥)으로 지은 연유 중 하나에 구업을 경계하고자 함도 있었습니다. 길상존은 부처님을 가리키는 의미와 더불어 ‘길상스러운 말을 하라’는 의미도 있지요.”
보살이 반문한다.
“스님은 자기 글이기에 매섭게 평가할지 몰라도 스님의 글을 읽고 위로와 평안을 얻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지 않습니까?”
스님은 단호하다.
“저는 중생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겠다고 서원한 중입니다. 제가 쓴 글이 그 길에 장애가 되어선 안 되겠지요. 사람들이 깨달음에 이르려면 자기로부터 나오는 참된 소리와 생각에 집중해야 합니다. 제 글이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불경을 읽어도 깨우침을 얻기 어려운 마당에 저의 글에서 얻을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제 책이 마음의 눈을 막지 않을까 저어되었습니다.”
보살은 스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뜻이 있었군요. 사람들이 스님이 던진 화두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을는지요?”
스님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잇는다.
“당나라 때 위산이란 선승과 향엄이란 제자가 있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향엄은 ‘자신이 본디 지니고 있는 순수한 심성’에 대해 이야기하라는 스승의 말에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합니다. 당황한 향엄은 온갖 서적과 선사(先師)들의 어록을 뒤졌지만 허사였지요. 향엄은 스승에게 다시 가 가르침을 청했지만 스승에게서 돌아온 건 ‘내 말은 내 견해일 뿐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이에 향엄은 애지중지하던 책을 다 불태워버리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었지요.
저는 사람들이 글자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바랍니다. 잠든 내면을 깨워 자신의 참된 소리를 듣고 얽매임도 거리낌도 없는 자유의 길을 가기를 기원합니다.”
∎ 참고 도서
1. 법정, 『서 있는 사람들』, 샘터, 2010
2. 『천수경』(https://namu.wiki/w/천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