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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 청소부 Nov 20. 2020

카탈로니아 찬가

서른다섯 살 늦깎이 학생인 나는 영국 중부도시에 있는 리즈(Leeds) 메트로폴리탄 대학에서 어학연수를 받고 있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는 중에 기숙사 옆방을 쓰는 B의 추천으로 조지 오웰의《Homage to Catalonia(카탈로니아 찬가)》 연극을 보게 되었다. 아버지의 고향이 스페인 카탈로니아 지역인 B에게는 의미가 남다른 작품이었다. 미술 대학 지망생이자 키도 크고 잘생긴 B는 나이도 한참 많은 나에게 기숙사 생활에서부터 주변 정보를 친절히 알려주는 고마운 학우였다. 초급 영어 수준인 내가 음악 공연이나 무용도 아닌 연극을 본다는 게 말도 안 되었지만, 신세 진 것도 있었고 또 다른 기숙사생인 H(서울 출신 22세 여자 대학생)까지 다 같이 보자고 부추기니 색다른 문화 경험이다 싶어 가기로 한 것이다.

  사실 문학책이라면 머리만 아프고 재미없다며 멀리했던 나는 조지 오웰의 작품을 단 한 편도 읽어본 적이 없었다. 워낙 유명한 작가라 이름과 대표작 제목 정도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B의 말로는 1937년에 벌어졌던 스페인 내전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스페인에 대한 역사적 지식도 없는 나로서는 우리나라 625전쟁과 비슷한 상황이 아니었을까 정도로 추측만 하고 연극을 본 셈이었다.


  한국의 연극 공연과는 달리 널따란 무대 뒤로 펼쳐진 큰 스크린 화면에는 영상과 함께 영어 자막이 제공되었고, 무대 옆 작은 단상에 서 있는 남성은 수화로 연극의 대사를 보여주었다. 장애인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모습을 배울만했다. 덕분에 배우들의 빠른 대사는 대부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자막의 도움을 받아 연극 분위기에 젖어 들 수 있었고, 끝날 무렵 대형 스크린에서 전투기가 민간인에게 사정없이 폭탄을 투여하는 장면이 연출되었을 때엔 그들이 느꼈을 공포와 아픔의 얼마큼은 공감할 수 있었다.

  연극을 보고 나온 뒤 소감을 B에게 말했더니 2주 후인 4월 부활절 방학 때 카탈로니아로 여행을 가보는 것이 어떠냐며 나와 H에게 제안했다. 어차피 자신은 방학을 맞아 집에 가야 하니 크게 부담을 갖지 말라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B가 항공권과 숙박 예약부터 처음 이틀간은 여행 가이드까지 해준다고 하니 이런 기회는 흔치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나보다 석 달 먼저 기숙사에 들어온 H는 영어를 꽤 잘했고 같이 여행을 가면 방도 같이 쓰고 B가 없을 때는 서로 의지해서 여행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이고 본격적인 여행 준비에 들어갔다.

  3박 4일 간의 짧은 스페인 여행이라 크게 준비할 것은 없었다. 카탈로니아(스페인 북부  바르셀로나·헤로나·레리다·타라고나의 4주(州)를 포함한다.) 지역인 바르셀로나와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 두 지역을 여행지로 정했다. 미술에 관심이 많고 디자인을 전공한 나를 배려해서 B가 주요 미술관과 가우디 건축물 투어를 추천해 주었고, 미술 전공자도 아닌 H는 무조건 내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괜찮다고 해줘서 여행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우리 일행은 바르셀로나에 도착하자마자 조지 오웰의 소설에 나오는 람블라스 거리를 시작으로 가우디의 주택과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성가족 대성당), 호안 미로, 살바도르 달리 그리고 피카소 미술관을 관람했다. 호안 미로 박물관 근처에는 황영조 선수가 1992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몬주익 언덕이 있어 잠시 들러 그때의 감동을 떠올렸다. 이틀간 바르셀로나에서의 알찬 여행을 마치고 저녁 비행기로 일행은 마드리드로 향했다. 마드리드 시내의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해서 B와는 헤어지고 나와 H 여장을 풀었다.



 

 씻고 나서 침대에 엎드려 앞으로의 일정을 확인하고 있는데 H가 곁에 다가와서는 말을 걸었다. “언니, 있잖아요.” 잠시 머뭇거리다 나의 표정을 살피더니 “언니, B가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했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에는 백마 탄 왕자에게 고백이라도 받은 양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B가 H를 좋아한다고?’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바로 옆방에 사는 내가 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었나 싶었다. 오히려 그간 B가 나에게 베풀어준 친절과 관심을 미루어 보건데 이 녀석이 설마 나를 좋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불가능한 일일 것 같지는 않았다. 이 세상에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연인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나라고 못 할 것도 없지 않은가. 가끔은 열아홉 살의  B를 이성으로 생각하며 달콤한 로맨스를 그려보기도 했었다.  

  한마디로 배신감과 질투가 동시에 터졌다. 나는 H가 기쁨에 겨워 계속 떠드는 이야기를 더는 들어줄 수가 없었다. 자야겠다고 말하고선 불을 껐다. 침대에 누운 순간 잠은커녕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그간의 일들을 하나씩 꺼내 재생해보니 내가 놓치고 있었던 사실들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조지 오웰의 연극을 볼 때도 이번 여행도 서로 호감을 느끼고 있었던 둘이서 나를 잘 이용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B와 H 사이에서 나는 사랑의 작대기, 견우와 직녀 사이의 오작교였을 뿐이었다.

  ‘이 빌어먹을 연놈들을!’


  이튿날 아침이 되어도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전에 프라도 미술관을 관람하고 나서 H는 냉랭한 나의 기운을 느껴선지 아니면 B가 없으니 이젠 맘대로 행동하겠다는 것인지, 이제 더 미술관은 싫다며 쇼핑도 하고 다른 관광지를 보겠다고 선언했다. 할 말을 잃었다. 우리는 각자 가고 싶은 데로 가기로 하고 그 자리에서 헤어졌다.

  H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아무나 붙잡고 내 기막힌 속을 다 털어내고 나를 기만한 저 발칙한 두 어린것에게 저주를 퍼부어야만 했다. 하지만 아는 이 하나 없는 낯선 도시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나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지금껏 상황을 전혀 눈치를 못 챘던 멍청한 내 자신이었다. 수치심에 여행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얼른 이 도시를 떠나고 싶었다. 컨디션도 최악이었다. 며칠 동안 무리했던 다리엔 통증이 시작됐고 입이 썼다.


  나는 점심으로 간단히 길거리에서 파는 샌드위치를 사 먹고 보온병에 담아 온 커피믹스를 마셨다. 따뜻한 커피 한 모금에 한숨이 한번 길게 나가더니 그 자리에 아주 조그마한 의욕이 들어앉았다. 손에 든 여행 지도를 펴고 다음 장소를 더듬었다. 다리도 아픈 데다 워낙 미술관을 많이 다녀서 또 미술관을 간다는 것이 망설여졌지만, 피카소의 작품 <게르니카>가 있다는 소피아 미술관을 안 보고 가면 후회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잠시 거리에서 휴식을 취한 후에 미술관에 갔다.

  스페인의 근·현대 미술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은 외관부터 유리로 이루어져 현대적인 이미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달리, 미로, 타피에스, 로베르토 마타 등 20세기의 뛰어난 예술가들의 작품을 먼저 둘러보고 가장 기대했던 특별 전시장, 피카소의 작품 단 하나만 전시되어있는 공간 입구에 섰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전에 스페인 왕립 미술관인 프라도에서 루벤스, 벨라스케스의 대작을 감상할 때도 떨리지 않았던 심장이었다. 이미 바르셀로나에서 피카소의 작품들을 많이 보고 왔음에도 뭔지 모를 아우라가 입구부터 전해졌다.


  거대한 방, 새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전시장에는 그야말로 <게르니카, 세로 349.3cm, 가로 776.6cm> 작품 하나만 벽면에 전시되어있었다. 피카소는 고국 스페인에서 자행된 게르니카 공습 신문 기사를 읽고, 그날부터 35일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엄청난 분노를 담아 전쟁의 참상을 폭로하는 그림을 그렸다.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 정부에 맞서 나치와 이탈리아가 지원하는 프랑코 장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1937년 4월 26일 오후 3시간 동안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인구 7천 명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에 비행기에서 투하된 50톤의 폭탄이 폐허로 만들었다.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었던가. <게르니카> 앞에 선 순간, 사방이 흑백으로 변하고 폭탄 터지는 소리, 비명, 살려달라고 절규하는 소리가 귀에 전해왔다. 폭격당한 집에 갇힌 짐승과 사람들, 어머니가 안은 아이의 머리는 뒤로 꺾여 있고 도와달라고 손짓하는 여인, 거대한 황소에 짓밟히는 사람들. 위대한 20세기 천재 화가의 대작을 보고 있노라니 격한 파도와 같은 전율이 나를 휘감았다. 앞서 스페인 내전에 관한 연극을 보았기에 감동은 배가 됐다. 작품 앞에서 한 발짝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감동이 좀 가라앉을 무렵 오전부터 시작됐던 무릎의 통증이 거세졌다. 아쉬움에 내일 재방문을 하겠노라 작품에게 인사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다음날 다시 찾아가려했으나 불행히도 휴관일이었다. 할 수 없이 스페인의 소설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동상이 서있는 스페인 광장에서 마지막 일정을 끝냈다. 공항에서 다시 두 연인을 재회했다. <게르니카>를 보고 받은 감동이 워낙 커서 그랬는지 B를 봐서라도 스페인을 떠나기 전에 그들을 용서해주려고 했다. 하지만 함께 있는 그들의 얼굴을 본 순간, 용서는 개뿔, 다시 분노가 일었고 영국에 도착해서도 그들과 말 한번 섞지 않았다.


  이후 시간이 날 때마다 여러 곳을 여행하였지만, 스페인만큼 강렬한 인상을 준 곳은 없었다. 전쟁의 참상을 담은 조지 오웰의 원작 연극을 보고 나서 배경이 된 나라를 여행하고 같은 주제를 담은 피카소의 대작 <게르니카>를 감상을 한다. 마치 테마 여행으로 기획한 것처럼 진행된 스페인 여행은 내게 잊을 수 없는 귀한 감동을 주었다.

  조지 오웰은 소설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스페인 사람들이 관대하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그들은 20세기에 속하지 않는 고귀한 종족이라고 말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만난 스페인 사람 B도 참 고마운 친구였다. 스페인을 다녀온 직후 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행동했던 그를 끝내 외면하고 헤어졌던 것이 후회된다. 나의 잘못이었다. 이제는 그의 호의 중 일부는 진심에서 우러나왔음을 믿는다.

 “Gracias B, Gracias Sp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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