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19:1-4
1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오늘의 성경 구절은 어찌 보면 이해하기 힘든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바로 직전 18장에서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을 대적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보였던 믿음의 영웅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용감함을 드러냈던 선지자였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번제물을 태웠고, 백성들은 "여호와 그가 하나님이시로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놀라운 승리의 순간 이후, 이세벨의 위협 한마디에 엘리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망칩니다. 그리고 광야의 로뎀 나무 아래에서 "이제 그만 죽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승리의 성취가 두려움과 무기력으로 곧 극심한 탈진과 우울로 변하였습니다. 이 극적인 반전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우울에 대한 진실을 알려줍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우울이나 정서적 어려움에 대해 잘못된 오해를 갖고 있습니다. 혹시 "믿음이 부족해서 우울한 것이 아닐까", "기도를 충분히 하지 않아서 이런 감정이 오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이런 생각들은 우울을 경험하는 사람에게 죄책감이라는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을 더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을 펼쳐보면, 하나님께 쓰임 받은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깊은 우울과 절망을 경험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엘리야뿐만 아니라 다윗은 시편에서 수없이 자신의 낙심과 슬픔을 토로했고, 욥은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했으며, 예레미야는 자신을 "슬픔의 선지자"라 불릴 만큼 깊은 고통을 표현했습니다.
더 나아가 우울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저에게도, TV에 나와 밝게 웃고 있는 연예인에게도, 교회 안에서 헌신적으로 섬기는 리더나 아름다운 목소리로 찬양하는 성가대원에게도, 금방 건강한 아기를 낳아 행복해 보이는 엄마에게도, 경제적으로 풍족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이 평온해 보이는 누군가에게도 우울은 예고 없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우울은 누구의 잘못이나 부족함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악한 세상과 연약한 인간 존재의 본질 안에서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현실입니다.
전문 상담자로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원인을 찾고 싶은 여러분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적어도 납득을 할 수 있어야 받아들일 수도 있을 테니까요. 혹시 이것이 제가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주심은 아닐까, 하나님께서 저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한 시험은 아닐까, 욥처럼 주시기도 하시고 가져가시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깨닫게 하시려는 과정은 아닐까 하는 여러 가능성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런 질문들은 신앙인으로서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명확한 답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그랬듯이, 우리가 쉽게 원인을 규정하고 판단하는 것은 때로 더 큰 상처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왜?"라는 질문은 때로 우리를 과거에 묶어두고 자책과 혼란 속으로 빠뜨립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질문에 빠져들기보다는, "어떻게 이 상황에서 회복의 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까"로 초점을 옮기는 것입니다. "왜?"라는 질문은 때로 우리를 과거에 묶어두고 자책과 혼란 속으로 빠뜨립니다. 하지만 어떻게라는 질문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작은 변화라도 시도할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끝없이 분석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천사를 보내어 먹을 것을 주시고, 쉬게 하시고, 다시 일어설 힘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호렙산으로 인도하셔서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라고 물으시며 새로운 사명으로 이끄셨습니다.
그러니 오늘, "왜 나에게"라는 오해를 내려놓고, "나는 나아질 수 있다"는 작은 믿음으로 한 걸음을 내디뎌보면 어떨까요? 이것은 단순히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우울은 의지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많은 경우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회복을 향한 첫걸음은 "나는 변화될 수 있고, 이 과정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결심에서 시작됩니다. 엘리야가 로뎀 나무 아래에서 포기하고 싶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금 어떤 어둠 속에 있든,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셨고,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우리가 다시 일어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회복을 향한 첫걸음은 "나는 변화될 수 있고,
이 과정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결심에서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그 시작점으로 삼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오늘 혹은 여러분이 이 글을 읽는 바로 그날을 종이에 적어보세요. "오늘부터 나는 회복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기로 결심한다"라고 작은 선언을 해보세요. 이것은 당장 모든 것이 변할 것이라는 약속이 아닙니다. 하지만 방향을 정하고, 그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가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분은 엘리야와 함께하셨던 것처럼, 앞으로의 회복 과정에서 우리와 함께 걸어가실 것입니다.
"하나님, 오늘 본문의 엘리야처럼 저도 지치고 낙심하였습니다. 두려움과 우울 앞에서 저는 나약한 인간일 뿐임을 다시 한번 고백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엘리야를 버리지 않으시고 먹이시고 재우시고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저도 주님의 그 은혜를 구합니다. "왜"라는 질문 속에 갇혀 있는 제 마음을 자유케 하시고,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지 지혜를 주소서. 오늘을 새로운 시작점으로 삼아 작은 걸음이라도 내딛을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그 과정에서 주님이 저와 함께하심을 경험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상담실에서 가장 자주 듣는 첫마디 중 하나가 "상담사님, 제가 이런 걸로 상담을 받아도 되나요?"입니다. 그 말속에는 "나는 충분히 강해야 하는데", "믿음으로 이겨내야 하는데", "이 정도로 힘들어하면 안 되는데"라는 스스로에 대한 판단이 담겨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말씀드립니다: "지금 이 자리에 오신 것, 도움이 필요하다고 인정하신 것 자체가 용기입니다.. 우울은 당신이 약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인간이기 때문에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나에게"라는 질문으로 스스로를 묶지 마세요. 대신 "오늘부터 어떻게"라고 물어보세요.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세요. 하나님도, 의사도, 상담 전문가도, 함께 걸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오늘이 그 시작점입니다.
아래는 제가 쓴 책입니다. 구매하셔서 회복과 성장의 도구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