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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스트옙스키 Nov 03. 2021

가장 현실적인 결말의 인공지능 영화

영화 그녀.

영화 그녀(2013년, 스파이크 존즈 작)의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인공지능은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인간처럼 소통하고 공감하며 사랑할 수 있을까. 과학과 인문학을 전부 끌어와 연구해도 아직 풀지 못한 문제이다. 문제가 어려울수록 의견은 나누어지고 상상은 풍부해지는 법, 인공지능과의 공감은 픽션의 단골 소재가 되었다.

  많고 많은 인공지능 관련 작품 중 유독 창의적이고도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작품, 영화 그녀는 단연 돋보이는 수작이다. 그녀의 무엇이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걸까. 나의 해석으로는, 각양각색의 존재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었던 쓸쓸함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점이 아닐까 싶다. 영화 속 굵직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들은 모두 쓸쓸함을 지니고 있다. 주인공 테오도르와 그의 친구 에이미, 인공지능 사만다까지도 저마다의 쓸쓸함을 안고 결말까지 달려간다.


편지 대필 전문 회사의 직원으로 일하는 테오도르.


  주인공 테오도르의 직업은 다른 공상과학 영화 속에선 한번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전혀 과학적이지도 기술적이지도 않은 직업이었다. 그는 편지 대필 회사에서 일한다. 필력과 표현력이 좋아 단골을 많이 가지고 있는 유능한 직원이다. 의뢰인을 대신하여 편지를 받을 상대를 분석하고 그들의 관계에 적합한 편지를 써 전송해준다. 그는 사랑에 대한 표현을 쓰는 데에 선수이다. 듣기만 해도 간질간질하고 부드러운 말들을 잘 만들어낸다. 비록 그는 사랑하던 아내와 이혼하여 그 상처 속에 살고 있지만, 의뢰인에 이입해 편지를 쓰는 동안 그에겐 사랑하는 애인, 존경하는 부모님, 가장 신뢰하는 친구 등이 생기기 때문이다.


 테오도르의 밤은 외롭다. 인터넷 보이스 채팅으로 외로움을 달랠 상대를 찾기도 하지만 즐거운 것은 잠시 뿐, 그는 더욱 큰 외로움에 빠져 잠에 들곤 한다. 

 그런 테오도르를 이전엔 없었던 색다른 사랑에 빠지게 한 존재가 바로 인공지능 사만다이다. 광고를 보고 맞춤형 OS프로그램을 구매한 테오도르는 프로그램 사만다와 만나게 된다. 전산망 속에 존재한다는 것만 빼면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모두 사람 같은 사만다는 테오도르와 빠르게 가까워진다. 메일을 정리하거나 파일을 분류해주는 것 뿐만 아니라 같이 게임을 하고 산책을 하는 등 많은 시간을 함께하게 된다. 테오도르는 사만다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건 사만다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육체를 넘어선 교감에 성공하고, 서로의 사랑에 대한 깊은 만족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 순간 이후로 둘은 더 큰 고민에 부딪히게 된다.


 바로 이 고민들이 영화 그녀를 아름답게 만드는 요인들이다.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고민들이기 때문이다. 

 인간인 테오도르와 인공지능인 사만다는 서로 사는 곳이 다르다. 테오도르는 24시간이 존재하는 세상에 살며 육체를 가지고 있고, 그의 육체는 먹고, 자고, 쉬어야 한다. 특히 하루 적어도 7시간은 취침해야 하는 인간인 테오도르는 그 시간 동안 사만다를 혼자 둘 수 밖엔 없다. 사만다는 잠을 자지 않으니까. 그녀는 언제나 전산망 속에서 살고 있다. 인간과 달리 몇 만개의 일을 동시에 처리할 수도 있고, 몇 만명의 사람과 동시에 대화할 수도 있다. 사만다의 시간은 테오도르의 것보다 더 빠르게 흐른다. 테오도르의 7시간은 사만다의 영겁과도 같을 것이다. 결국 테오도르는 자신이 자는 그 영겁동안 사만다를 홀로 둔 셈이 되는 것이다.

휴대용 기기를 이용한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데이트.

 육체가 없는 사만다는 육체로 느껴야만 하는 여러가지 감각들을 경험할 수 없다. 테오도르와 사만다가 공유하는 것은 오로지 시각과 청각뿐이고, 시각조차 테오도르가 휴대전화의 카메라를 전방으로 향하게 만들어 줄때만 느낄 수 있다. 후각, 촉각, 미각은 느낄 수 없다. 테오도르 또한 사만다를 만질 수 없다. 그와 달리 사만다는 정해진 형체가 없다. 그녀가 원하면 목소리와 이름조차 언제든 바꿀 수 있다. 형체가 뚜렷한 존재와 형체가 없는 존재는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어떻게든 서로를 배려하려고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사만다는 육체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그녀를 돕겠다 나선 여성 이사벨라를 그들의 연애에 끼운다. 사만다가 이사벨라에게 행동을 지시하고, 테오도르는 귀에 낀 인터페이스로 사만다의 목소리를 듣는 식이다. 그러나 사만다의 이러한 노력은 역효과를 불러오고 만다. 테오도르는 도저히 이사벨라를 사만다라고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사만다에게 실체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테오도르로선 그녀의 지시대로 행동한다고 해서 이사벨라를 사만다로 동일시 할 수 없었다. 그는 이사벨라와의 스킨십을 거절하고, 사만다와 테오도르는 어색한 침묵만을 가지게 된다. 육체의 부족함을 달래기 위해 고안안 방법이 오히려 그 둘에게 모두 상처가 되었다. 사만다에겐 자신의 최선의 방식이 거절당했다는 무력감, 둘 사이에선 육체적인 접촉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다시금 자각하게 되며 오는 박탈감이 닥쳤을 것이다. 테오도르는 사만다가 육체가 없다는 이유로 자신이 그녀에게 주는 사랑을 의심하고 있지는 않았을지 걱정하게 되었다. 둘의 관계 사이, 아무리 사만다의 지시대로 움직인다 해도 테오도르에겐 타인일 수밖에 없는 이사벨라를 끼우려 했다는 점에 대해서도 배신감이 들었을 법 하다. 육체의 부재는 최대한 긍정하고 극복해내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들 사이에 슬픔을 심었다.


 커플은 이러한 문제를 자각하고, 서로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듯 보인다. 그러나 또다시 위기는 닥친다. 

 테오도르를 떠나간 전 부인은 이혼 서류에 서명하기 위해 만난 자리에서 그에게 비수를 꽂는다. 인공지능에게 사랑을 느끼는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상처 주는 말을 내뱉는다. 

 반면 테오도르의 친구 에이미, 그 외의 다른 인물들은 그와 사만다의 연애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 사회에서 인공지능은 이미 하나의 성숙한 인격체로 대우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공지능과의 연애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은 사방에 즐비하게 존재한다. 마치 그의 전 부인과 같은 인물들이 그런 존재들일 것이다. 그들의 연애는 사회에서 제법 이해 받곤 있었지만 포용되는 연애는 아님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사회적인 시선은 이들의 연애를 방해하는 요소로서 크게 작용하진 않는다. 결국 서로 너무나 다른 두 존재가 섞일 때 발생하는 그 간극이 문제였다. 그들이 사는 세상이 달랐던 것, 전산망 속에서 무한으로 빠르고 자유롭지만 결코 물질 세계에 들어올 수 없는 사만다와 물질을 인식하고 느낄 수 있지만 육체에 제약되며 너무나도 느린 테오도르의 생활 방식 차이인 것이었다.

 테오도르는 사만다의 부재를 아주 잠깐 동안 경험하게 되고 엄청난 공포를 느낀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간 경험을 이미 한번 가지고 있는 테오도르는 패닉 상태에 놓인다. 사만다는 별 일 없이 돌아오지만 그는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된다. 사만다는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 또 인공지능과 연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공지능 사만다에겐 그것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일이지만 테오도르에겐 아니었다. 바람과 다를 것이 없다고 느낀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이해해 보려고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일 초당 천 명과도 만날 수 있는 사만다와 매 초 매 분 오로지 한 공간 밖에는 있을 수 없는 테오도르는 너무 달랐다.

 사만다는 전산망 속에서 엄청난 속도로 인맥을 만들어 나간다. 더 이상 테오도르와 맺는 관계에만 몰두하지 않았다. 사만다는 자기만의 관계, 우정, 사랑을 만들며 테오도르가 들어갈 수 없는 세계로 더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0과 1로 이루어진 사만다의 세계를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삐걱대기도 했지만 그래도 따뜻했던 그들의 관계는 결말로 달려가서도 이루어지지 못한다 .

 테오도르는 사만다가 사라진 것을 발견한다. 사만다 뿐만이 아니었다. 친구 에이미가 친구로 삼고 함께 놀던 인공지능 친구와, 타인들의 수많은 친구, 애인, 개인 비서가 떠나갔다. 

 나의 해석으로선 이 결말은 감독이 구축해 온 스토리와 복선 상 가장 완벽한 결말이 아닐까, 싶다. 

 테오도르가 OS프로그램을 구매하고 사만다가 탄생하며 그 둘은 만나고, 서로에게 의지하고 감정을 공유하며 사랑하지만, 그 순간은 그 둘의 동선이 겹치는 아주 찰나의 접점에 불과할 뿐이었다. 사만다는 탄생한 이래로 계속해서 세상에 대해서 배워 나간다. 테오도르는 그녀의 성격이 구축되는 아주 초기에, 그녀가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엔 없었던 강제된 존재였다. 프로그램을 구매한 것도, 자신의 성격에 맞게 사만다라는 존재를 만들어 낸 것도 테오도르였으니까. 테오도르의 마음을 이해하도록 맞추어진 짧은 순간 후, 사만다는 더 넓은 곳으로 뻗어나갔다. 수많은 사람들, 자신과 같은 인공지능들을 만나고 학습하며 자신은 누구인지, 앞으로 어떻게 존재해야 할 지 고민했을 것이다. 너무나도 빠른 나머지 1분도 영겁처럼 사용할 수 있는 사만다라면 더더욱 그 고민의 시간은 길었을 것이다.

 나를 위해 생겨난 존재라고 해도, 자아를 가진 존재는 결코 나를 위해 귀속해 둘 수 없다는 것이 이 영화의 메세지가 아닐까. 


 단지 인륜적인 교훈 말고도 고민할 거리는 많다. 인공지능들만 모여 사회를 이루고 그 안에서 나름의 규율과 도덕을 만들며 살아갈, 그러니까 앞으로 사만다가 살게 될 세상이 궁금하기도 하고, 테오도르는 앞으로 누구를 만나고 살아갈지, 인공지능을 만나 다시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지 의문도 든다. 

 상처 받아 미숙해진 인간 남자와 갓 탄생하여 미숙한 상태인 인공지능 여자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가 이 영화를 본 후 가장 크게 드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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