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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스트옙스키 Sep 02. 2021

회벽 위로 덧그리는 젊은 생의 그래피티

영화 레토.

영화 레토(2018년,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작)의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레토, 레테, 썸머, 여름. 영화의 제목은 단 한 단어에 불과하다. 여름. 포스터 안의 흑백 사람들은 전혀 더워보이지 않음에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곳은 여름이라. 스크린을 서늘한 정적으로 채우는 흑백의 소련 거리 위로 꿈틀거리는 노랫말이 지나간다. 록스타를 꿈꾸는 청년들, 기타, 벌거벗을 자유와 러시아 바다. 냉전의 잔뜩 벼려진 한기 위로 여자들의 목소리가 속삭인다. 레토, 레테, 썸머, 여름. 마치 군함을 향해 노래부르는 세이렌처럼 매끄럽고도 새콤하게. 


 레토는 소련의 전설적인 밴드 키노, 키노의 중심에 있던 빅토르 최의 삶을 다루고 있다. 빅토르 최 역할은 현재 국내에서도 입지를 다지고 있는 배우 유태오가 맡았다. 록스타 마이크 역은 로만 빌릭이, 마이크의 연인이자 뮤즈 나타샤 역은 이리나 스타르센바움이 맡아 연기한다. 러시아 배우들에 대해선 알지 못하지만 필름 안에서의 연기 궁합이 매우 좋았다. 거침없이 뻗어나가는 듯 보이는 열정들 사이, 조금의 힘만 가해도 언제든 깨질 수 있을 것만 같은 위태로운 예민함이 적절히 드러났다. 


기차에서 토킹헤즈의 사이코 킬러를 부르는 장면.

 감독의 연출 기법은 색다르고 개성적이면서도 아주 신랄했다. 속이 훤히 비쳐 보이는 은유를 입은 직설이었다. 감독의 사상과 지향성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면모에서 대담함이 느껴진다. 차분하다 못해 적적한 흑백의 장면들 위로, 스크랩해둔 조간 신문 위 낙서를 그리는 것처럼 그림들이 나타난다. 이 낙서는 곧, 가슴 속으로 원했던 세상에 대한 모습이다. 현실에 상상을 덧칠하여 이랬으면 좋을텐데, 이래야 할텐데, 하는 것들을 감독이 분필로 그려낸 것 같달까. 낙서가 하나씩 생겨나기 시작하고, 주변의 사람들이 한 명씩 노래 가사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흑백의 단정한 분위기는 완전히 뒤집힌다. 자유롭고 생기 넘치며, 무질서하지만 그 모습이 미학적으로 완전히 아름다운 상태가 된다. 이 장면이 분명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일 것이다. 


안경을 쓴 남자, 이건 없던 일이다. 

 노래가 끝나갈 무렵엔 꼭 이 남자가 등장한다. 이건 없던 일이다, 빨간색으로 쓰인 글씨를 화면에 비춘다. 그리고 노래는 끝난다. 상황은 다시 적막하게 정리된다. 남자는 젊은이들의 상상과 그럴 수 없는 현실 사이 선을 긋는 존재나 다름없다. 그의 등장으로 인해 상상은 더욱 유혹적이고 아름다운 것이 되며, 현실은 더욱 딱딱하고 숨막히는 것이 된다. 이 남자의 존재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갈릴 것이다. 이것은 없던 일임을 선포하며 상상을 억제하려는건지, 현실에 부딪혀 갈리기 전에 상상을 상상으로 남겨주려는 건지, 움직이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시키려 짙은 빨간색의 글씨로 도발을 걸어오는 것인지. 이 중 하나일지도 모르고, 이 모두일지도 모르고, 이 밖의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 분명한 것은, 이 남자의 등장으로 인하여 우리는 낙서와 음악이 떠다니는 환상 속에서 헤엄치다 다시 자세를 고쳐앉고 영화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토킹헤즈, 루 리드, 티렉스, 이기 팝 등과 같은 그 시대 뮤지션들의 음악을 듣는 것도 이 영화의 묘미이다. 미국에선 호응을 얻지 못했던 펑크가 영국을 지배하기 시작하고, 섹스 피스톨즈, 더 클래시, 라몬즈 등이 등장했다. 실력이고, 곡 구성이고, 일단 지르고 보자! 같은 감성이 물씬 느껴지는, 저항의 전신인 펑크가 세계를 씹어삼켰다. 

 펑크 정신은 DIY, 야나두 같은 개념을 표하고 있다. 야 너두 할 수 있어, 처럼 기타가 있고 베이스가 있고 드럼이 있고 사람이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펑크였다. 화려한 연주 실력도, 노래 실력도 요구되지 않았다. 코드 세 개만 반복해서 치더라도, 연주하다 중간에 싸구려 악기가 고장나 버리더라도 그냥 외치는 게 펑크였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펑크에 뛰어 들었고, 악기랑 앰프 꽂을 곳만 있다면 밴드가 생겨났다. 펑크는 가장 멋있는 것이었고, 누구나 할 수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시대의 다이너마이트였다. 폭탄을 맞을 것인가, 던질 것인가? 후자를 고른 사람들은 파워코드를 폭탄 소리처럼 갈겨댔다. 펑크족들은 혼란한 시대를 더욱 혼란하게 만들었다. 세상을 더욱 어지럽히는 악동들이었지만, 그 악동들로 인해 세상은 조금이나마 숨을 쉬었다. 

 펑크 정신은 소련에서 자라진 못했다. 사회에 도움이 되는가? 공익성을 가지는가? 의 기준으로 음악이 검열 당하던 국가에서 펑크는 자랄 수 없었다. 물론 위로 자라지 못했다는 것이다. 땅 위로 싹을 뻗지 못했을 뿐, 흙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깊이 깊이 파고들어갔다. 풀어놓는 것보다 금지하는 것이 더 사람의 욕망을 자극하는 법. 소련의 로커들은 국가의 눈을 피해 곡을 만들고 무대에 섰다. 할 수 있는 것보다 금지되어 있는 것이 더 많았지만, 그 선을 조금씩 침범하고 물러나기를 반복하며 게릴라전을 펼쳤다. 레토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공연장 정숙을 위해 팬이 플래카드를 들거나 환호하는 것도 금지하는 세상, 당당하게 하트를 그린 플래카드를 드는 나타샤나, 공연에서 부를 수 없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문제적 가사를 적어내리는 빅토르 최나. 저 나름대로 '안 되는 일이긴 하지만 봐주고 싶어지는 매력적인 경범죄'를 저지르며 자유를 가로막는 벽 위로 빗금을 그어내린다. 노골적인 네이키드를 그리기도 하고 비탄에 빠져 엄마를 부르는 젊은이를 그리기도 한다. 땅 위로 드러날 수 없다는 현실에 로커들은 절망하지만 그럼에도 노래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음악에서 삶을 찾았다. 음악의 포기는 삶의 포기였을 것이다. 색색의 살아있는 혼돈을 묻고 시멘트를 바른 소련의 지하에선 여전히 색채와 욕망이, 삶이 꿈틀대고 있었던 것이다.


 빅토르 최와 마이크, 나타샤는 금기와 반항을 욕망한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설령 거짓을 말하는 순간이 생긴다 해도 금세 진실을 토해 버린다. 오만하고 아름답다. 꾸미지 않고 내지르던 시대 속, 고함이 틀어막히자 읊조림으로라도 진실을 토했던 로커와 연인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흡인력을 가진다. 단정한 흑백 이미지가 색채 없이도 시끄럽게 조잘대기 시작하고 그 조잘댐 끝에 색채가 터지는 순간 보는 이의 머릿속에서도 드디어, 하는 쾌감이 터진다. '드디어'의 순간에서 맛본 쾌감은 곧 푯말을 든 남자에 의해 잠재워진다. 영화는 담담하게 끝이 난다. 우리도 잠재워진 채 끝을 바라본다. 잠든 것은 언젠가 깨어나기 마련이다. 당신 안에 드글거리기 시작한 주인공들의 정서를 잘 들여다 보자. 그 끝에서 당신이 진정 열망하는 것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를 둘러싼 잿빛 현실에 진한 라커로 휘갈겨 보자. 레토, 레테, 여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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