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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스트옙스키 Jul 21. 2021

원시적 푸른색, 그리고 부딪히는 아이덴티티

영화 그랑블루.


 영화 그랑블루(1993년, 뤽 베송 작)의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무언가 보고 싶다는 욕망은 있는데 도무지 무얼 봐야할 지 모르겠을 때 반드시 꺼내는 영화, 백 번을 봐도 사랑스러울 영화 그랑블루. 처음 쓰는 영화 리뷰는 무조건 그랑블루의 이야기가 되어야만 했다. 그랑블루를 지나치고는 도무지 아무것도 쓸 수 없기에. 그만큼 사랑하니까.


 영화의 프로필을 읊자면, 명작으로 손꼽히는 영화 레옹의 감독 뤽 베송의 1993년작 영화이다. 그의 페르소나 장 르노가 역시나 등장하고 로잔나 아퀘트도 나온다. 주연은 프랑스 배우 장마르크 바가 맡았다. 필름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바다가 등장한다. 영미권에서는 빅 블루라는 타이틀로 개봉한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선 프랑스어 발음 그대로 그랑-블루 로 개봉했다.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혀를 굴리며 미끄러지는 발음이 유려한 느낌을 준다. 영화를 잘 수식한다.


 복잡한 스토리나 첨예한 장치는 없다. 아름다움에 대한 고민과 철학적 고찰들이 매 컷마다 눈에 띤다. 처음 보고 난 후에는 이게 뭐야? 싶을지 몰라도 분명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찾게 될 것이다. 눈 앞을 가득 메울만큼 넓고 진한 푸른색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삶에서 몇 번이나 되겠는가.

 중심에 있는 세 인물의 마음 또한 정상적인 방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두 잠수 챔피언과 사랑을 쫓아 직장도 관두고 타국으로 날아온 여자. 셋은 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이유로 함께 웃지만 곧 모두 틀어져 버리고 만다. 연인의 임신 따위는 상관 없다는 듯 바다로 떠나는 자크, 모두의 말을 묵살하고 잠수에 나서다 죽음을 맞는 엔조, 본인의 전부를 주었음에도 자기를 떠나버리려는 연인을 보내주는 조안나. 이들의 중심에는 바다가 있었다. 바다는 그들을 한 장소로 모아주었으나, 파도가 모래사장을 훑어가듯 다시 갈라놓아 버렸다. 두 남자는 바다로, 여자는 뭍에. 결말은 가히 완벽했다. 사랑의 결실도, 챔피언이라는 성취도 이뤄주지 않지만, 인물들은 전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고향, 자신이 사랑하는 공간, 자신이 있어야 하는 곳. 영화는 미끈하게 유영하며 셋을 그들의 장소로 데려다 놓는다. 그 끝에서, 우리는 아득한 카타르시스를 얻는다.


 셋에게서 이끌어낼 수 있는 핵심적인 키워드는 각각 이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크의 노스탤지어, 엔조의 과시욕, 조안나의 소유욕. 더하여 그들 셋을 모두 수식하는 단어는 사랑. 사랑은 모두 바다를 향해 있다. 

자크와 돌고래.

   자크는 사람이라기에 기이한 면모를 보인다. 영화 초반, 극지의 바다 속으로 잠수하는 자크의 심전도를 보며 박사가 말한다. 이건 사람이 아니라 어류에게서나 나타나는 심전도라고. 이미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둘 수밖엔 없다. 자크의 기이함은 보험사 직원으로서 업무를 처리하러 왔을 뿐인 조안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영화 중반에선 분명 자크도 조안나와 사랑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때였을 뿐, 자크는 바다 이외의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시도때도 없이 바다로 뛰어들고, 돌고래와 수영한다. 그에게 조안나와의 사랑, 잠수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은 그저 인간의 역할에 불과했던 것이 아닐까. 분명 사랑했다고 생각했으나, 분명 갈망했다고 생각했으나 사랑할수록 갈망할수록 진해지는 괴리. 그가 잠수하는 이유는 챔피언십의 참가자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는 왔던 곳으로 돌아가길 원했던 것일 뿐, 어떤 타이틀도 달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버린 물고기, 그렇기 때문에 본인이 있어야 할 곳을 영문도 모른 채 그리워했고, 자신과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며 고뇌했다. 그의 선택은 결국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 그의 지독한 향수병은 마지막 씬에서 잠재워졌고, 그는 검푸른 바다 밑으로 돌고래와 함께 사라졌다. 

 

엔조의 최후.

 엔조의 자아는 한눈에 보기에도 비대하다. 어딘가 모르게 쟤, 재수 없네. 이런 인상을 남겼던 엔조의 유년 시절, 그리고 몸 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굳이 잠수를 강행한 고집, 생의 마지막 순간조차도 자신을 바다에 보내달라는 어찌 보면 무책임할 유언. 엔조는 바다를 사랑했다. 본인이 누구보다도 바다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으며, 누구도 자신보다 더 바다를 사랑할 수 없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자크의 존재는 엔조에게 행복이자 무한한 시기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자신과 같은 목적, 같은 감정을 지녔지만 자신과는 다른 향기를 지닌 자크. 아무리 타국의 언어를 연습한다 해도 그 언어를 사용하는 모국인은 따라잡을 수 없는 것처럼. 엔조의 삶은 바다를 사랑하는 남자, 그렇기에 바다에서 최고가 된 남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진행되었다. 엄청난 부담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부담을 온전히 짊어진 것 만으로도 충분히 과시할 거리가 생기지 않는가. 그는 자신의 사랑이 칭송을 통하여 증명받길 원했다. 엔조의 최후는 이를 완벽히 설명해낸다. 본인의 사랑에 대한 최후의 증명, 부담을 떨치고 얻어낸 자유. 자신이 평생 사랑해 온 대상으로의 영원한 귀속. 바다에 대한 엔조의 사랑을 보다 보면, 로미오가 떠오른다. 필사적으로 무엇이든 내던져온 남자. 마지막엔 자신 또한 내던진 남자. 거들먹거리는 자세와 능글맞은 어투를 가진 그이지만 바다를 향한 사랑은 진정 순애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를 응원할 수밖엔 없다. 그를 사랑할 수밖엔 없다. 그의 마지막 선택까지도.


위험한 잠수를 강행하려는 자크를 돕는 조안나.

 조안나, 순애라면 조안나 또한 일가견이 있다.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 모든것을 내던지고 첫눈에 반한 남자를 따라 미국에서 유럽으로 단숨에 날아왔다. 조안나의 목표는 단 하나, 자크. 조안나의 삶의 목적도 자크를 만난 순간 그로 바뀌었다. 자신의 모든 걸 바친 상대가 자신을 똑같이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건 당연한 감정이다. 자신이 준 만큼 보답 받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자크는 조안나의 기대를 무참히 벗어난다. 자신과 보내는 시간보다 바다에 가 있는 시간이 더 많은 자크를 보며 조안나는 애원한다. 부디 자신을 봐 달라고. 마지막 씬, 대체 왜 바다로 가려고 하는 거냐고, 그 밑은 아무것도 없고 추울 뿐이라고. 그런데, 자신은 여기에 있다고. 바로 여기에 있다고 외치는 조안나는 애처롭기 그지없다. 그러나 조안나는 첫 만남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크의 범상치 않음, 인간답지 않은 기이함에 끌렸다는 것을. 그의 바다 냄새에 매료된 조안나는 결심을 내린다. 그를 보내주기로. 정말 가고 싶어요? 그럼 가요. 가서 무엇이 있는지 봐요, 내 사랑. 조안나는 그 순간 이 이기적이고도 무책임하게 보이는 남자를 이해했다. 자신의 새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새의 행복을 위해 새장 문을 열었다. 그 순간 그녀는 행복하진 않았을 것이다. 급작스러운 이별이 어떻게 행복하게 다가올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조안나의 결정은 더욱 숭고해졌다. 내가 그를 사랑하여 그를 가지고 싶은 만큼, 그도 바다로 돌아가고 싶었으리라. 조안나는 밧줄을 당겨 보호구를 풀었다. 자크는 물 속으로 들어가버렸지만 조안나는 뭍에 남았다. 마치 인어를 사랑한 인간처럼, 상대가 저 깊숙한 곳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도 그저 행복하기를, 건강하기를 읊조릴 수밖엔 없다. 그녀는 뭍의 사람이니까. 바다를 진득하게 품어본 그녀는 이제 남은 시간들을 어떻게 살아갈까. 우리는 그 뒤를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뒷이야기를 있는 힘을 다해 응원하게 된다. 생생했던 백일몽에서 일어난 조안나를 지켜봐주고 싶어진다.


 바다라는 소재를 사용하여 풀어낸 세 사람의 이야기, 분명 그랑블루를 보고 실망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바다를 떠올리면 기대하게 되는 청량하고 역동적인 장면들, 서스펜스들은 이 영화에 없다. 그러나 곱씹다 보면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 영화를 왜 만들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짙은 푸른빛 사랑을 통해 세상을 다시 바라본다. 우리는 무엇을 갈망하고 있는지, 당신의 바다는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게 된다. 사랑이라는 불가항력과 거대한 자연의 대표적 상인 바다가 얽혀 일으켜낸 거대한 해일. 이 안으로 몸을 던지며 오늘 밤은 사색해보자. 당신의 마음 또한 짙은 푸른색으로 물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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