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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자냥 May 20. 2021

대체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가즈오 이시구로, <클라라와 태양>



지난 2월에 내 고양이가 몹시 아팠다. 장염과 췌장염으로 이틀  입원했는데, 퇴원하고 집에 와서는 오히려 상태가 나빠져 다시 병원을 가니, 녀석 폐에 물이 찼고 심장병 진단까지 받아 또다시 입원을 했다. 그때는 심지어 ‘산소방’에 들어갔는데, 너무나 절망적인 소리를 들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펑펑 울었다. 어떤  존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 존재가 너무나 아프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울기는 태어나 처음이었다. 녀석 없이 일주일 가까이 지내는 날들은 참 이상했다. 허전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녀석이 혹시라도 그렇게 병원에서 세상을 떠난다면 그 이후 내 삶을 상상할 수 없어서 하루하루가 몹시 힘들었다. 다행스럽게도 녀석은 건강해졌고 어쩐지 병원에서 과다 처치를 해서 일시적으로 심장에 무리가 갔던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심장 크기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건강해진 녀석은 다시 내 곁에서 잠들고 일어나 내 눈썹을 그루밍해주면서  애정을 표현하는데 지금도 가끔은 그날 길에서 펑펑 울던 순간이 떠올라 마음 한편이 서늘해지곤 한다. 

이  녀석이 사라진다면 내 삶은 얼마나 달라질까. 물론, 언젠가는 정말 작별을 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럼에도 이 녀석이 사라진다면 나는 내 고양이를 잊을 수 있을까? 어떤 존재가 세상을 떠난 후, 남겨진 이들이 겪는 아픔이 크다. 그 상실감과 빈자리. 그래서 사람들은 때때로 그 빈자리를 채우고자 또 다른 존재를 그 자리에 ‘대신’ 앉혀놓기도 한다.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경우엔 또 다른 사랑을 만나고, 아이를 잃었다면 다시 아이를 낳거나, 반려동물과 이별했다면 또 다른 동물에게 애정을 준다. 그런데 만일 기술이 크게 발달해서, 잃어버린 존재를 똑같이 본떠 만든 AI가 그 존재를 대신한다면, 그건 그 존재일까 아닐까?  예컨대, 내 고양이가 세상을 떠났는데, 녀석의 겉모습을 똑같이 만들고, 녀석의 평소 행동, 취향, 습성까지 인공지능이 정확히  모방해 그 똑같은 겉모습 속에 이식되어 내게 주어진다면 난 행복할까?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내 눈썹을 핥아주는 녀석과 나만 아는 이  깜찍한 행동을 똑같이 따라 하는 AI라면? 나는 녀석이 복제된 인공지능 로봇임을 알면서도 사랑할 수 있을까. 그 AI 고양이는 내 둘째 고양이의 ‘마음’까지 완벽하게 학습해서 자기 것으로 삼았는데, 그 마음은, 그 사랑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클라라와  태양>을 읽다 보니 ‘조시’와 조시의 엄마 ‘크리시’의 관계를 문득 내 고양이와 내 관계로 대입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클라라’는 ‘유전자 향상’으로 지능과 능력은 향상되었을지언정 그로 인해 병약해지고 사회적 소통 능력도 떨어지는 소녀 ‘조시’가 매장에서 사 오는 AF(Artificial Friend) 로봇이다. 조시 같은 아이들이 선택하는 친구 아닌 친구인 셈이다. 클라라는 갓 출시된 모델 B3에 비해서는 한 단계 아래인 B2 모델로 점점 아이들의 선택을 받는 일이 줄어들고 있는데, 다른 에이에프들과  달리 세상을 관찰하면서 보고 배우는 능력이 뛰어나다. 조시가 클라라를 유독 좋아하는 이유도 이런 능력에서 생겨난 클라라 고유만의  매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설정 때문에 작품 초반을 읽을 때는 클라라와 조시, 인공지능 로봇과 인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우정에 관한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크리시가 클라라를 선택한 이유를 알게 되는 순간부터 작품은 좀 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아무 감정이 없는 게 가끔은 좋을 거야. 네가 부럽다.”
나는 이 말을 잠시 생각해 보고 말했다. “저에게도 여러 감정이 있다고 생각해요. 더 많이 관찰할수록 더 다양한 감정이 생겨요.” 
어머니가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려서 나는 놀랐다. “만약 그렇다면, 너무 열심히 관찰하지 않는 게 좋겠다.” (<클라라와 태양>, 150쪽)


몸이  약한 조시가 언젠가는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리던 크리시는 클라라에게 조시를 학습하게 한다. 조시를 대체할 존재로 클라라를 점찍은 것이다. 크리시를 위해서, 조시를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클라라는 조시를 이어, 조시로 살아가야 한다는 주문을 받는다. 그러면서 크리시는 클라라에게 인간의 마음이라는 걸 믿느냐고, ‘사람을 특별하고 개별적인 존재로 만드는’ 마음을  믿느냐고 질문한다. 만일 정말 그런 게 있다면 조시의 습관이나 특징만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 ‘조시의 마음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클라라도 아리송하기만 한 이 ‘마음’에 대해서는 인간들도 확답을 갖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조시를 복제하는 일에  열성을 보이는 ‘카팔디’는 인간에게 고유한 그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은 틀렸다고, 그런 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부류로, 그런 게 있다고 믿는 크리시 같은 사람들을 ‘감상적’이라고 말한다. 클라라를 비롯한 에이에프들을 차갑게 대하는 조시의 아버지는 카팔디를 혐오하는데, 사실 그런 마음 깊은 곳에는 카팔디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를 미워한다. 그는 정말 딸 조시만의 고유한 무언가는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사람들이 지금까지 수세기 동안 내내 서로 사랑하고 증오하며 함께 살았지만 모두  잘못된 가정에 근거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일종의 무지나 미신은 아니었을까 두렵기만 하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마음’에 관한 이런 논쟁들을 지켜보며 그런 기준으로만 해석해 본다면 클라라는 단순한 인공지능 로봇일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관찰하고, 보고, 학습해서 ‘마음’을 배운다면 그 마음은 그저 하나의 학습물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조시가 낫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죽었다고 생각한 ‘거지 아저씨’를 살려낸 태양의 놀라운 능력을 보고, 해를 찾아가 간절히 조시를 위해 기도하는 그 마음, 누군가를 위해 희망을 품을 근거를 찾고, 그 희망을 놓지 않으려 애쓰는 마음도 그저 모두 ‘학습의 결과물’,  또는 ‘기술적 복사’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클라라의 이 타인을 위한 순수한 마음들에 비하면 유전적으로 향상되어 지적 능력은  높아졌을지 모르지만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방식에 서투르기 짝이 없어서 타인에게 아무렇지 않게 상처 주는 조시의 교류 모임 친구들이 오히려 인공지능 로봇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클라라보다 향상된 모델인 B3는 AF매장에 전시되었을 때 자기들끼리 서로 눈짓과 신호를 주고받으며 오래된 에이에프들을 슬금슬금 피한다. 능력이 떨어지는 에이에프들을 따돌리는 것이다. 이 로봇들은 어디서 이런 행태를 익혔을까? 인간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런 마음은 인간다운 마음일까 아닐까? 이 작품에서는 인간을 ‘대체’한 로봇으로 인해 일자리를 빼앗긴 인간들이 시위하는 장면도 나오고,  AF에게 혐오감을 드러내는 인간들도 종종 보인다. 그러나 그런 이들도 ‘인간’을 또 다른 ‘인간’으로 대체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에게 폭력과 혐오를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그렇다면 이런 행동과 마음들도 인간 고유의  것이기에 인간다운 것일까? 특별한 관계였다고 할 수 있는 클라라와 조시의 관계도 어느 순간에는 변한다. 조시와 릭의 관계가 변하듯. 그러나 조시와 릭의 관계와는 달리, 조시가 클라라를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다르다. “내가 돌아오면 넌 여기 없겠구나.” 말할 수 있는 대상일 뿐이다. 클라라에게 조시는 대체할 수 없는 존재였지만 조시에게 클라라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이기적인  마음을 지닌 ‘인간’에 비해 클라라의 헌신과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는 그 간절하고 순수한 마음이야말로 이 작품에서 가장 인간다운  마음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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