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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자냥 Jun 10. 2021

너무 멀고 먼 펠리시아의 그 길

윌리엄 트레버, <펠리시아의 여정>



내 마음을 들뜨게 하는 작가 윌리엄 트레버의 신간이 나왔다. <펠리시아의 여정>. 소외되고 연약한 이들의 삶을 담담하고 서정적 문체로, 따스한 시선으로 그려온 윌리엄 트레버. 제목을 보니 이번에는 ‘펠리시아’라는 이름의 한 인물의 삶을 따라가는가 보다 싶다. 그의 신간 소식에는 늘 마음이 들뜨지만, 실제로 책장을 펼치면 그 들뜨던 마음은 곧 차분히 가라앉는다.

작품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녀는 계속 멀미를 한다. 화장실에서 어떤 여자가 말한다.’ 멀미 중인 여인, 펠리시아. 갑판에 올라가 신선한 바람을 쐬라는 다른 여자의 말을 보면, 그녀가 배를 타고 어딘가 여행을 떠나는 중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다음 문장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여행을 위해 고른 옷들은 초록색 쇼핑백 두 개에 들어 있고, 돈은 핸드백에 있다. 쇼핑백은 초크스에서 돈을 주고 사야 했다. 하나에 50펜스씩.’ 여행을 떠났는데, 짐을 여행 가방도 아닌 초록색 쇼핑백에 넣었다니? 뭔가 좀 이상하다. ‘환전소에서 아일랜드 지폐를 영국 돈으로 바꾸었다’는 문장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펠리시아는 아일랜드에서 영국으로 배를 타고 여행을 떠났음을 알 수 있다.

그다음 장을 펼쳐보니 여행을 떠나면서 옷을 고작 쇼핑백 두 개에 담을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바로 설명된다. 지난밤에 그녀는 증조할머니와 함께 쓰는 침실에서 살그머니 쇼핑백을 들고 나와 뒷마당 창고로 가서는 대충 쌓아둔 오래된 나무판자들 뒤에 숨겨놓았던 것이고, 날이 밝자 할머니 몰래 침실을 빠져나와 아버지에게 들키기 전 집을 나온 것이다. 버스를 타기 전에도 펠리시아는 아버지와 오빠들에게 붙잡힐까 봐 신경을 곤두세운다. 여행이 아니라, 가출, 그것도 가족들을 피해 달아나는 모양새다. 그러니 당연히 여행 가방을 챙길 리가 없고, 쇼핑백에 남몰래 옷을 챙겨 도주하듯이 집을 탈출한 것이다.

펠리시아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갑자기 그다음 장은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힐디치 씨’로 십여 년 넘게 124킬로그램을 유지하고 있는 50대의 중년 남자이다. 두껍고 동그란 안경을 썼으며 비둘기색 머리카락을 짧게 유지하고 단정한 차림과 광을 낸 구두 등 이웃이 보기에 흠잡을 데 없는 평범하고 선량한 시민이다. 그는 1979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로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듀크 오브 웰링턴 로드 3번지의 커다란 집에서 혼자 살고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에도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그는 어느 공장의 구내식당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데, 먹는 것과 식료품에 관심이 많은 그에게는 아주 적절한, 즐거운 일자리이다. 회사에서도 선량하고 자기 일에 열심인 그는 동료나 나이 어린 직원들에게 깍듯한 대접을 받고 있으며 그런 자신을, 자기의 일을 기꺼이 즐긴다.

이제 막 10대를 벗어난 게 틀림없는 이 나이 어린 ‘펠리시아’와 50대의 중년 남자 ‘힐디치’- 어찌 보면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 두 사람이 번갈아 소개되자 나는 다시 궁금해진다. 이 두 사람이 어떤 인연으로 엮일 것인지. 윌리엄 트레버의 많은 작품들이 그렇듯이 아마도 펠리시아는 어떤 견디지 못할 상황이 있어 힘들게 집을 벗어나 영국 땅으로 왔고, 가진 것도 없는 이 젊은 여자가 현실의 온갖 어려움에 부딪히자 영국의 중산층인 이 마음씨 좋은 힐디치 씨가 그녀를 돕게 되면서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꼭 그것이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로 인해 서로의 상처라든가 아픔을 치유하는 그런 이야기는 아닐까 상상하게 된다. 나의 이 예상은 얼마쯤은 맞지만 얼마쯤은 완전히 빗나간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펠리시아의 고되었던 생활이 얼핏 스쳐 지나간다. 사실 <펠리시아의 여정>의 미덕 중 하나는 아일랜드와 영국의 그 오랜 뿌리 깊은 반목을 비롯해 1980년대 아일랜드와 영국의 암울한 사회상을 자연스럽게 엿볼 수 있다는 점인데, 펠리시아가 다니던 통조림 공장도 느닷없이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를 들며 폐업을 했고(이 무렵 영국에서 처음 광우병이 발생했다), 그로 인해 그녀는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 상태였다. 모아둔 돈도 다 써버렸고, 일자리를 잃으면서 친구들과 카페에 앉아 있을 자유, 비용을 따지지 않고 여가 시간을 보낼 자유도 빼앗긴 상태이다. 게다가 집으로 들어오는 실업수당은 모조리 가족의 식비와 생활비로 들어갔다. 홀아버지가 이끄는 집안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일자리는 쉽게 구해지지 않는데, 그 와중에도 아버지는 펠리시아가 파트타임으로 일하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실직 상태를 벗어나면서도 계속 집안일을 그녀 혼자 도맡아 하고, 증조할머니를 돌보는 것도, 아버지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오빠들을 위해 식사 준비를 할 수 있을 터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만으로도 펠리시아의 처지가 몹시 갑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더 큰 문제는 다른 데 있다. 펠리시아에게 사랑 운운하며 다가왔던 한 남자, ‘조니’가 주소는 남기지 않은 채, 그녀 뱃속에 새 생명만을 남겨주고는 영국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에서는 낙태가 불법이다. 아이 아버지는 잔디 깎기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한다는 말만 남기고는 영국으로 날아가버린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 배는 불러오고 펠리시아는 다급해져 집을 떠나 영국에 무작정 온 것이다. 서울 사는 김서방 찾기도 아니고 이 순진한 아가씨가 조니를 찾을 리가 만무하다. 게다가 펠리시아는 알지 못하지만 독자도, 펠리시아의 아버지조차도, 아니 조니의 엄마조차도 다 알고 있다. 조니는 기회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깜빡해서 그런 게 아니라 일부러 주소를 주지 않고 떠나버린 것임을. 설상가상으로 그 무렵 영국의 경제상황도 꽤 좋지 못해 공장마다 문을 닫거나 업종 변경을 했기에 아무리 찾아봐도 잔디 깎기를 만드는 공장을 발견할 수가 없다. 이런 펠리시아를 힐디치 씨는 우연히 보게 되고 그녀가 도움이 필요한 존재임을 한눈에 알아본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를 돕기 위해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펠리시아도 처음에는 그를 경계하지만 이 덩치 크고 순박하면서도 깍듯하고, 따뜻한 남자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고 그의 도움을 받아들이게 된다.

여기까지는 트레버의 기존 작품들의 설정과 보면 거의 비슷하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힐디치 씨는 왜 펠리시아를 도와주려고 하면서 거짓말을 하는 걸까? 그는 평생 혼자 살았는데, 갑자기 아내가 펠리시아를 도와주라고 했다면서, 아내 ‘에이다’라는 존재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발견되면서 나는 잔뜩 긴장한다. 게다가 그는 거짓말을 너무나 능수능란하게 잘한다. 조심해, 펠리시아 그 남자는 겉보기랑 달라. 뭔가 이상해! 덫에 걸린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 아니면 그는 진심으로 펠리시아를 돕고 싶은데, 경계를 풀어주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그렇지만 그럼에도, 거짓말은 뭔가 석연치 않고, 그 능수능란함은 더욱 소름이 끼친다.
  

여자아이들은 엉망진창이 된 삶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혹은 그냥 뭔가 다른 것을 원해서 길을 떠난다. 여정 중인 그들을 본 이들은 알다가도 모를 아이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대도시나 여자를 사고파는 일이 있을 만한 큰 동네에서는 랜드로버나 폭스바겐, 도요타의 차 문이 열리며 아이들을 태운다. 콘스 씨 집에 그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들은 상점 입구에 머물러보기도 한다. 모든 일에는 다 처음이 있기 마련이라고 말하며 노상의 잠자리에 자리 잡는다. 한동안은 실종으로 처리되지만 나중에는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다. 밑바닥 인생. 이제 그들은 그렇게 불린다. (306~307쪽)


<펠리시아의 여정>이라는 제목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문학 작품에서 집을 떠나 여행길에 오른 주인공은 온갖 고난 끝에 성장해서 집으로 돌아오곤 한다. 펠리시아도 자의 반 타의 반 집을 떠났고 여러 고난을 맞닥뜨린다. 그런데 펠리시아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길에서 맞닥뜨린 그 수많은 어려움을 과연 성장을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볼 수 있을까? 이 책을 읽는 내내 펠리시아 앞에 놓인 그 길들이 너무나 험난하고 위험하며 안타까워 보여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순진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 여자는 어쩌면 이토록 세상의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트레버는 한 인터뷰에서 “이 책은 선함에 관한 이야기”라 말했다고 한다. 처음 이 책을 받아 들고 휘리릭 훑다가 책 뒷부분에 있는 이 문장을 읽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더 이 작품을 여행길에 오른 펠리시아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그녀를 돕는 선한 사람들의 이야기인가 보다 했다. 실제로 이 작품에서 펠리시아를 도우려는 손길은 여럿 등장한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존재인 펠리시아에게 처음 다정하게 다가선 조니를 비롯해 힐디치 씨는 물론이요. ‘캘리거리’ 같은 종교단체 일원도 그렇다. 모두가 선한 마음으로 펠리시아에게 다가온다. 문제는 그 선함이 과연 펠리시아에게도 선한 것일까 하는 것이다. 자기들에게는 선(善)일지 몰라도 그녀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다들 상대를 위하기보다는 자기 잇속을 차리려는 목적이 강했다. 이런 것도 선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럼에도 분명 이 작품 속에 선함은 존재한다. 그런데 그 선을 마주하기까지 너무나 지난한 악을 만나야 한다. 어쩌면 우리의 삶이 그렇다는 것을 이 거장은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삶에 존재하는 선은 지극히 드물지만, 반드시 존재하고 바로 그렇기에 삶을 살아갈 희망이 거기에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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