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잠자냥 Aug 24. 2021

벽장 속 벽장에 갇힌 그들의 사랑

토마시예드로프스키,<어둠 속에서 헤엄치기>


성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가는 이를 일컬어 ‘벽장 속 게이 또는 레즈비언’이라고 말한다. 이성애자처럼 자신의 성적 취향을 밝혀도 사회가 아무런 차별도 억압도 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자기 성정체성을  떳떳하게 드러낼 것이다. 아니 이성애자가 나, 이성애자야 하고 굳이 말하지 않듯이, 그런 세상이라면 동성애자도 굳이 자신의 성적  취향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지구 상 대부분의 사회가 그렇지 않기에, 오늘도 어느 나라 어느 장소에서는 그들의 성적  취향이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혐오와 조롱의 대상이 되고, 차별받고 폭력을 당하며 또 때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목숨을 잃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벽장 속에 자신의 정체성을 고이 숨기고 살아간다. 이토록 살아가기 벅찬 힘겨운 세상에 굳이 그  사실을 드러내 이중으로 시달리고 싶지는 않기에.

그럼에도 자유가 허용되는 사회에서는 용감하게 자신이 그런 사람임을 밝히고 살아가는 이들이 분명 있다. 우리나라도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 몇 년 전부터는 퀴어퍼레이드도 열리고, 자신의 성정체성을 당당히 드러내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이들도 많아졌다. 이 땅에서는 그런다고 해서 누군가의 증오와 혐오로 살해당하지는 않는다(물론 자살하는 이들은 분명히 있다. 여기서 내가 뜻하는 것은 성정체성 때문에  일어나는 ‘살인’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마저도 허용되지 않은 사회에서 동성애자로 살아가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아니 대체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일까. <어둠 속에서 헤엄치기>는 그렇게 암담한 사회에서,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고  살아가는 게이 소년의 이야기이다. 벽장 속의 벽장에 갇힌 한 소년, 아니 두 청년의 이야기- 1980년대 사회주의 제체 하의  폴란드는 자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암흑, 그러니까 ‘어둠’과도 같은 사회이다. 빵 한 덩이 얻으려면 길게 줄을 서야 하고, ‘자유’의 소식을 들려주는 라디오 방송은 남몰래 들어야만 하고, 혹시라도 이런 체제 비판적인 소리를 하면 언제 어떻게 당에 고발당할지 몰라 모두가 숨죽이고 사는 세상.

이런 분위기 속에 소년 ‘루드비크’는 할머니와 엄마의 사랑을 담뿍 받으며 아무런 고통 없이 자라난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아홉 살 무렵, 자신이 남들과 다르게 또래 소년을 욕망한다는 것을 깨닫고 혼란에 빠진다. 이런 소년의 성향을 눈치라도 챘던 것인지 할머니는  루드비크가 소년답지 못한 행동을 하거나 엄마와 오랫동안 한 침대를 쓰면서 지나치게 친밀한 사이로 지내는 것도 못마땅한 눈길로  바라본다. 그렇게 키우면 비정상적인 애가 된다면서 딸에게 경고를 준다. 루드비크는 할머니의 ‘비정상’이라는 말에 바락바락 성을  내며 분노한다. 자신은 비정상이 아니라고. 어쩌면 이미 그 어린 시절에 자신이 남과 다름을, 그리고 그 남과 다르다는 이유가  앞으로 살아갈 자신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줄 알았기에 자기는 비정상이 아니라고 그렇게 소리 높여 주장했던 것은 아닐까.  

혼란과 수치심, 갈망…… 그런 시기를 보내며  루드비크는 대학생이 된다. 그리고 드디어 너, ‘야누시’를 만난다. 그것도 어느 찬란한 여름날 당에서 의무적으로 강요한  농촌활동에서……. 사실 이 작품은 애초에 현재 미국 뉴욕에 사는 ‘나’, 루드비크가 지난날의 연인인 ‘너’ 야누시에게 편지 형식으로 글을 쓰고 있기에 이 두 사람이 지금은 함께 있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루드비크는 폴란드를 떠나 미국이라는 자유로운 체제로 옮겨 왔음을 독자는 이미 알고 시작한다. 그렇기에 이 두 사람이 그 여름, 그 눈부신 계절, 열여덟이라는 찬란한 나이에  만나 서로를 알아보고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 때문에 행복하면서도 고통받고, 결국은 헤어지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음을 독자는 알고 시작하는 셈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 그리고 한없이 서로에게 빠져서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던 순간, 체제에 비판적인 루드비크와 달리, 폴란드 사회주의 체제를 신봉하는(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야누시와의 어쩔 수 없는 갈등 등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 

루드비크는 할머니와 엄마로부터 전폭적인 사랑을 받았고, 어느 순간부터는 할머니와 엄마가 듣던 자유유럽 방송을 접하며 자란다. 자유가 있는 세상의 가치를 일찌감치 깨달은 것이다. 그렇기에 이 체제의 모순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이 체제에서, 자신의  성정체성은, 사랑은 위험하기만 하다는 것을 알기에 더더욱 숨겨야 한다. 그래서 자유를 더 갈망한다. 그에 비해 야누시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서구 사회라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을 평등적인 교육의 기회를 얻었고, 병든 가족도 당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때문에 알지도 못하는 서방의 자유를 꿈꾸는 루드비크의 행위는 그가 보기에 몽상가적 기질일 뿐이며, 당에 충성하면 언제든  성공할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은 나날이 굳건해져만 간다. 그렇기에 야누시는 루드비크와 이 체제 안에서 성공해서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리고 그는 그럴 자신이 있다. 체제를 벗어나자고 어둠 속에서 함께 헤엄쳐 나가자고 말하는 루드비크와 이 체제 안에서  살아갈 방법을 찾자는 야누시, 두 사람의 사랑은 과연 어떻게 될지, 루드비크가 이미 뉴욕에서 저 멀리 떨어진 너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데도, 궁금증에 책장이 빠르게 넘어간다. 

이 작품은 여러 장점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책 한 권이 큰 역할을 한다는 점은 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루드비크가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다가 용기를 얻게 되는 계기도, 또 무엇보다 루드비크와 야누시가 가까워지는, 아니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계기도 바로 이 책 한 권, 그러니까 제임스 볼드윈의 <조반니의 방>에서 시작된다는 설정은 너무나 공감이 간다. 그리고 그 책은 두 사람 사이에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게다가 이 작품에는 앨런 홀링허스트의 <수영장 도서관>처럼 성착취도 없고(나는 <수영장 도서관>의 그 부잣집 게이들이 자기보다 한참 어린 소년들을 탐하는 것을 성착취로 본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처럼 자신의 성정체성을 숨기려고 여성을 이용하지도 않는다, 물론 어떤 이의  눈에는 야누시가 하니아를 그렇게 이용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야누시는 그 체제 아래서 살아남으려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  아닐까. 그리고 루드비크에게 중요한 순간에 누구보다 힘이 되어준 그 두 여성 캐릭터, 카롤리나와 하니아도 좋았다. 나는 그래서 이 착하고 슬픈 소설을 마음으로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루드비크가  야누시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무리 그를 사랑한다고 해도 그  자유 없는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야누시는 또 얼마나 그 억압된 체제 아래서, 여전히 벽장 속 벽장에 갇힌 채 살아가고  있을까. 두 남자의 사랑이 끝내 먹먹하기만 하다.



작가의 이전글 세상의 모든 딸들아 떨쳐 일어나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