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사탑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돌무더기고, 자세히 보아도 돌무더기니 무엇인지 묻는 학생이 잘 없습니다. 길이 닦이고 건물이 세워지는 과정에서 헐어지고 옮겨진 방사탑은 이제 제주에 50개 남짓 남았습니다. 절대자의 뜻을 거스르고자 했던 바벨탑이 폐허가 되었듯, 천지신명의 기운을 막아내고자 했던 방사탑도 하나하나씩 무너지고 있습니다. 형태와 목적을 잃어버린 오래된 돌탑은 자연스럽게 돌무덤으로 변합니다. 돌무덤의 바닥에는 주걱과 밥솥이 매장되어 있으며 재물을 긁어모으고자 하는 의미가 있다고 하네요. 탑의 꼭대기에는 사람이나 새 모양 돌을 올려 악귀를 막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탑이라고 하면 대체로 화강암 석탑을 먼저 떠올리지만 제주도의 석탑은 섬에 지천으로 깔린 현무암으로 만듭니다. 방사탑은 물론이고 석탑, 마을 비석, 정주석, 각질 제거용 현무암 등등.... 표면은 꺼칠하고 제 멋대로 뚫린 구멍 때문에 현무암은 사실 그다지 멋이랄 게 없습니다. 그런데 수백 킬로는 족히 나갈 현무암을 쌓아 올린 방사탑에서는 바람을 거스르는 힘과 자연에 녹아드는 유연함이 조화를 이룹니다. 마을 포구와 능선을 따라 이어진 방사탑은 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심하여 세운 공동체 정신의 표상이자 지역을 대표하는 예술 작품입니다.
오래된 건축물을 볼 때마다 수명이 없는 만물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형태가 있는 모든 존재는 풍화와 마모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방사탑은 제주의 거친 바람과 몰아치는 파도, 보수를 포기한 인간으로 인해 균열과 낙석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염원이 무너지는 과정을 목격하면서 저는 이를 그림으로 남기기로 결심했습니다. 펜으로 현무암을 한 땀 한 땀 쌓아 올렸고 방사탑이 막아내고자 했던 기운을 빈 하늘에 채워 넣었습니다. 그림은 나쁜 기운을 막아내고자 했던 새 주인의 품에 안겼습니다. 희미해지는 탑의 정신을 제 나름의 방식으로 승화시켜보고 싶었습니다.
버려진 마방을 거슬로 올라가니 거대한 목장 위에 흩어진 탑의 흔적들이 보입니다.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 널찍한 평원에 말들만이 삼삼오오 모여 풀을 뜯고 있습니다. 망국의 봉수탑을 조사하는 고고학자가 된 기분입니다.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작은 돌로 쌓아 올린 평범한 돌탑과는 다르게, 마을 사람들이 합심하여 세운 방사탑에는 지역의 문화와 역사가 녹아있습니다. 망부석 설화에서 4.3 사건과 훈련소 설치 과정에서 오용된 근대까지.... 방사탑이 무너지면 마을 사람들이 곡식을 조금씩 걷어 다시 탑을 세웠다고 합니다. 1990년대부터 방사탑을 복원하거나 신설하자는 이야기가 제주 곳곳에서 나오기 시작했고 공원과 기념관, 콘서트장에 방사탑이 세워지거나 방사탑을 모티브로 한 건물이 건축되기도 하였습니다.
학생들이 제주에서 느끼는 이국적인 느낌(일반 여행객도 똑같이 느끼겠지만)은 주민들이 품고 있는 지역에 대한 애정과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에서 만들어집니다. 어느 지역을 여행해도 비슷한 아파트, 역, 도로를 만나야만 하는 획일화된 사회에서 바다라는 거대한 장애물이 형성한 문화 장벽은 제주만의 가치와 개성을 유지시킴과 동시에 새롭게 창조하고 있었습니다. 제주도의 방사탑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제주도의 주민들이 다시 일어서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