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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들바람이 솨솨 이야기하면 나는 무어라 말할까

경기서적 책방지기 추천책

by 행복한독서

산책의 언어

우숙영 지음 / 이민선 그림 / 344쪽 / 19,000원 / 목수책방



“가을은 풀벌레 소리와 함께 온다. 매미 소리가 기운 없이 땅 위로 툭툭 떨어지고 귀뚜라미가 맹렬하게 날개를 비비기 시작하면 아침과 저녁이 상크름해진다. 사늘한 기운을 지닌 생량머리가 찾아온다.”


맞닥뜨리는 그 어떤 일도 너그러이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높고 푸른 요즈음의 가을 하늘 아래 아침 산책길은 늘 상쾌하고, 하루 중 어느 시간대의 산책보다도 모든 것이 싱그럽고 새로이 보인다. 눈에 와닿는 것들로부터 감탄의 표현들이 넘쳐나는 최고의 시간이지만, 마땅한 언어가 떠오르지 않는 때가 생기기도 한다. 지금 빨리 나를 안아주는 이 자연의 모습을 무어라 말해주면 좋을까 하는 아쉬움이 길어지기 전에 진부하지 않으면서 온기 가득한 말로 표현하고 싶었던 적이 사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다 문득 『산책의 언어』를 발견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쏟아져 나오는 신간들 중에서 눈여겨보는 몇몇 출판사의 책들은 늘 일관되게 보여주고자 하는 책들을 세상에 내보이고 있는데, 산책길에서 입가에 맴도는 머뭇거림을 시원하게 해소해준 책을 운 좋게 제때 만난 것이다.


『산책의 언어』는 단어들이 모인 사전식 구성과 짧고 따뜻한 에세이, 단순해서 더 좋은 그림은 물론 자연을 더욱 잘 발견하게 되고 자연의 곁에서 이해하는 마음이 달라질 수 있도록 나를 도왔다. 이 책은 정말이지 자연 속에서 무언가 발견하고 나면 표현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말로 표현하는 인간이란 존재에게는 최고의 매력을 무한대로 지녔다.


책을 손에 쥐기도 전에 출판사의 책 소개 글로 먼저 만난 단어는 ‘먼산주름’. 첩첩이 있는 여러 산들의 능선이 겹쳐서 마치 주름이 진 듯이 보이는 것을 뜻하는 이 단어는 차를 타고 도시와 멀어지며 차창 밖으로 산이 내게 다가올 때 느껴지는 겹겹의 산세들을 보는 내 마음을 이루 말할 수가 없을 때 ‘첩첩산중이네, 산세가 남달라. 겹겹이 푸르고 푸르고 검푸르네.’ 정도로만 이야기할 수 있었던 내가 뱉어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단어가 되어주었다.

그런가 하면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거나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특히나 콘크리트 건물 속에서 창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과 햇살을 느끼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전혀 차갑거나 메마르지 않은 단어들로 온기를 여기저기 채울 수 있어 좋았다.

폭발적으로 말이 늘기 시작한 아기에게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귀여운 표현들을 가지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 채 입으로 뱉어내면 단어들이 마음을 든든히 채우는 것만 같아 행복했다. 오죽하면 몇 가지 단어들을 모아 언제든 꺼내어볼 수 있도록 낱말카드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을까.


내일 나는 아기와 함께 또 어떤 풍경을 만나 자연의 말들을 나누게 될까. 아침나절 집을 나서서 난달 한가운데 당당한 발걸음으로 열매나무 아래 앉아 땅내를 맡으며 도사리를 장난감 삼아 놀기도 하고 풀떨기에도 지지 않고 헤쳐 걸어갈 작은 걸음발. 저녁의 놀구름 아래서도 씩씩하게 하루를 보낼 나의 길벗에게 건들바람은 조그만 몸을 부드러이 감쌀 것만 같다.


이유리_경기서적 책방지기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2년 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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