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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Jun 19. 2024

책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실험

떨어지는 빗방울의 끔찍한 결말

아드리앵 파를랑주 지음 / 문정인 옮김 / 32쪽 / 19,000원 / 달그림



여름 저녁, 하루의 끝 무렵이다. 빗방울 하나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림 속 나무꼭대기쯤에서 비 한 방울이 땅에 닿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아주 잠깐이다. 눈꺼풀을 느리게 감았다 뜨면 이미 떨어져 있을 빗방울이다. 초를 헤아릴 수 없는 그 찰나의 일을 아드리앵 파를랑주는 11장면으로 그렸다. 적은 분량인데도 금방 읽게 되진 않는다. 책장을 넘기면서 독자는 자꾸만 앞뒤 장면을 거푸 재확인하게 된다. 지금 보는 장면 전후로 무엇이 달라졌는지 구분하기 위해서다. 장면마다 미세하게 달라지는 인물들의 움직임은 독자를 더 오래 붙들어둔다. 그 차이를 찾으며 읽어가는 동안 실제 빗방울이 떨어지는 시간의 수십 배가 흘러간다. 집중하여 숨죽이며 느린 동작으로 페이지를 넘기는 사이 클라이맥스인 10번째 장면이 펼쳐진다. 이 장면은 펼쳐진다고 하기엔 너무 팽팽한 느낌이다. 모든 등장인물은 시위를 힘껏 당긴 활처럼 호를 그리듯 배치되어 뒤이어질 소동을 예고하는 중이다. 빗방울은 물을 싫어하는 꿀벌 머리 위에 이제 막 닿기 직전이다. 당연히 마지막 장면에 글은 생략된다. 말이 필요 없는 예상이 가능한 결말이기 때문이다.

일련의 사건을 설명하는 건 왼쪽 한 문장씩의 글이다. 짧은 글은 가로로 배치되어 수평으로 읽힌다. 오른쪽 그림은 빗방울 동선을 따라 세로로 배치, 수직으로 읽게 된다. 사람들은 나무 아래 수직으로 서있고 빗방울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중이다. 수평 운동은 일정한 속도를 유지할 수 있지만 수직 낙하 운동은 가속도가 붙으니 누구라도 저마다의 빠른 속도를 체감하게 된다. 다행히 수평의 문장이 속도를 늦춘다. 문장을 읽는 시간에다 그림의 차이를 앞뒤로 살피는 시간이 더해져 가속의 시간은 그 의미를 잃고 만다.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다.


이 책을 다 읽었다면 휘리릭 빠르게 넘기며 다시 보자. 오른쪽 그림들에 시선을 고정해 재빨리 넘기면 아주 짧은 동영상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 빗방울이 떨어지는 순간이 동영상처럼 휙 지나간다. 플립북 구조가 적용된 것이다. 이 책을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이 된다. 영화적 감각을 11장 그림만으로 체험하게끔 연출해 그림책과 영화과 전혀 무관하지 않음을 자연스레 알려준다. 이렇게 작가의 실험은 책 한 권을 입체적으로 즐길 수 있는 설계에까지 이르렀다.


노을 진 저녁 풍경을 배경으로 지는 햇살을 받아 역광 처리한 인물들은 납작해 보이지만 플립북이 되면 달라진다. 연결된 움직임이 사물과 인물 모두를 생생히 살아나게 만든다. 디지털 작업으로 아날로그를 체험하게도 만든다. 번역되지 않은 책들은 물론 이제껏 확인할 수 있었던 작가의 작업들은 상상 이상이었다. 평면의 이미지를 뛰어넘어 입체적이면서도 상호 소통 방식으로 체험하게끔 만든 책을 선물처럼 내놓은 것이다. 책갈피, 셀로판지, 타공 등을 활용해 모든 요소가 텍스트로 기능하게 만들어 독자의 참여를 이끌었다. 빗방울 하나가 떨어지는 걸 다시 동영상으로 넘겨보며 책의 지속가능성을 직관하게 만드는 그의 더 많은 시도를 기대하게 된다. 


김혜진_그림책보다연구소 대표, 『야금야금 그림책 잘 읽는 법』 저자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4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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