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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Oct 04. 2024

지구 생명체의 찬란한 이야기

찬란한 멸종

이정모 지음 / 352쪽 / 21,000원 / 다산북스



“나는 2150년형 인공지능이다. 내 기록을 읽을 수 있는 생명체는 이제 더 이상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류가 멸종한 후 덩그러니 지구에 남겨진 한 인공지능의 독백으로 『찬란한 멸종』은 시작한다. 첫 문장부터 뭐가 어쨌다는 것인지 궁금해지니 일단 성공이다. 사실 『찬란한 멸종』이라는 제목부터 호기심을 자극한다. 프롤로그에서 저자 이정모는 “흔히 멸종이라고 하면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새로운 생명 탄생의 찬란한 시작이기도 합니다”라고 제목을 ‘찬란한 멸종’으로 지은 이유를 친절하게 밝힌다. 제목과 첫 문장을 잡았으니 이 책은 독자들의 마음을 훔칠 필요조건을 갖췄다. 나도 매혹됐다. 제목과 첫 문장의 관문을 찬란하게 통과했으니 이제 따져볼 것은 글이나 책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내용과 형식이다. 이 책의 내용은 제목에서 드러난 것 같이 지구 생명체의 멸종에 관한 이야기다. 책의 형식에 대해서도 저자는 친절하게 설명한다. 

“저는 최대한 호모 사피엔스의 시각에서 벗어나 각 시대의 주인공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독자 여러분도 이 책을 통해서 17개 장면의 주인공이 되어보면 어떨까요?”


『찬란한 멸종』의 미덕은 내용과 형식이 균형과 조화를 이룬다는 점이다. 지구비등화의 시기를 직면한 우리 시대에는 이를 바탕으로 한 멸종 관련 이야기가 넘쳐난다.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이 아주 낯설지는 않고 어느 정도 익숙하다는 말이다. 다섯 번의 대멸종에 대해서 한번은 들어봤을 것이다. ‘인류세’라는 단어도 이젠 제법 익숙해졌다. 기후변화에 대한 우려도 자주 만나는 주제다. 이런 맥락에서 인류의 멸종을 포함한 여섯 번째 대멸종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도 이런 것들이다. 다른 책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렇다고 이 주제와 내용에 대해서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다. 바로 이 지점이 『찬란한 멸종』이 승부를 거는 지점인 것 같다. 이 책에서는 어느 정도는 익숙하지만 아주 낯설지도 않은 주제와 내용을 다룬다. 일반인들의 눈높이에 맞춘 이 시대의 평균적이고 보편적인 이야기를 다룬다는 것이다. 클리셰가 진한 막장 드라마를 많은 사람들이 보는 이유는 익숙함에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익숙한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돼있다. 약간이라도 말이다. ‘멸종’은 말하자면 그런 보편적이고 평균적인 주제다.

메가테리움 화석(영국 자연사박물관) ⓒ위키피디아

문제는 이 주제와 내용을 어떤 형식에 넣어서 스토리를 만드는가 하는 것이다. 약간 익숙한 내용이나 이야기가 평균에만 머문다면 사람들은 곧 이를 외면할 것이다. 어떤 막장 드라마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다른 막장 드라마는 외면당한다. 그 차이점은 무엇일까? 평균에서 벗어난 편차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평균이 약간의 익숙함이라면 편차는 약간의 낯섦이라고 하겠다. 너무 낯선 주제와 내용이라면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따라가기 힘들어할 것이다. 너무 익숙한 주제와 내용이라면 구태여 관심을 갖고 경청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돌산호 ⓒ셔터스톡

호모 사피엔스는 스토리텔링 애니멀이다. 이야기에 몰입한다. 『찬란한 멸종』은 평균적인 주제와 내용을 공중에 떠 있는 외줄에 올려놓고 약간의 편차를 주면서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외줄타기 곡예를 하는 책이다. 이정모는 곡예사다. 인류가 멸종한 후 홀로 남겨진 가상의 인공지능부터 범고래, 찰스 다윈, 네안데르탈인, 산호초 그리고 심지어는 지구까지 일인칭 화자로 등장해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어쩌면 뻔할 수 있는 이야기를 외줄에 올려놓고 다른 화자의 입을 통해서 낯설게 풀어 놓는다. 저자만의 주장이 아닌 여러 대상의 고백으로 내용을 채우면서 한 걸음 물러나서 ‘멸종’이라는 주제를 볼 수 있는 메타인지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의인화는 이야기를 친근하게 이끌어가는 데 아주 효과적인 전략이다. 하지만 넘치면 핵심을 벗어나서 공감이라는 인간화의 관점으로만 붕괴할 수도 있다. 저자는 화자의 의인화 전략과 동시에 과학을 바탕으로 한 팩트를 적합하게 소개하면서 객관적인 균형을 유지하는 솜씨를 보여준다. 『찬란한 멸종』은 곡예사 이정모가 펼치는 외줄타기 묘기다.

웨들바다표범 ⓒ셔터스톡

이 책의 진짜 미덕은 내용과 형식의 조화를 뛰어넘는 다른 지점에 있다. 태도다. 저자의 태도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는 멸종 이야기를 하면서도 “나는 인류가 지속하는 지구를 꿈꿉니다”(11쪽)라던지 “우리는 그저 자연에 적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을 바꿀 수 있는 존재니까요. 인류는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10쪽)라고 하면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이런 인지적 낙관주의가 책의 곳곳에 등장한다. 이 책은 멸종을 다루지만 사람들을 겁박하면서 윽박지르지 않는다. 모든 것이 다 잘될 거라는 헛된 희망을 노래하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류의 『찬란한 멸종』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를 공유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충분한 기술이 있었다. 그들이 멸종하기 130년 전에도 기후변화를 막는 데 필요한 기술의 95퍼센트가 있었으며 이 기술을 사회에 적용하는 데 충분한 돈도 있었다. 또 많은 사람이 에너지 전환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절실하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해결하리라 믿었다”(37쪽)고 고백하는 인지적 낙관주의자의 태도에 공감하는 것이다. 『찬란한 멸종』은 이정모가 뿜어내는 찬란한 스토리의 분수다.


이명현_과학책방 갈다 대표, 『호모 사피엔스 씨의 위험한 고민』 공저자


-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4년 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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