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킹
피트 오즈월드 글·그림 / 마술연필 옮김 / 40쪽 / 16,000원 / 보물창고
작가에게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적 특성과 환경은 작품 주제와 이야기를 발전시키는 단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특히 오랜 시간 동안 사랑받는 명작의 경우 더욱 도드라지게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본인 스스로 경험하고 느낀 감정에서 키워낸 작품에는 독자의 깊은 몰입을 유도하는 주제 의식과 이야기 속 오류가 없는 강한 서사와 그림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불과 몇 해 전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던 타인과의 대면 그리고 외출과 같은 일상이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림책 분야에서도 집 안에서 겪는 가족과 어린이 상상의 세계와 대면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다채로운 사회활동을 다르게 대체해 가는 우리의 모습, 가족 단위로 자연을 즐기기 위해 인적이 드문 야외로 이동하여 삶을 다시 되돌아보는 작품들이 나타났습니다. 피트 오즈월드 작가의 『하이킹』은 아빠와 단둘이 산행을 떠나는 이야기로 대자연이 우리 마음에 선사하는 위로와 희망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고향인 유타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한 이후 해안선을 바라보며 영감을 받아 그려낸 풍경화로 갤러리 전시를 열었던 작가의 역량은 『하이킹』의 표지를 넘기고 작품의 타이틀과 함께 만나는 첫 장면부터 다분하게 나타납니다. 미국 중산층을 대변하는 단독주택과 아담한 마당이 자리한 동네 풍경 뒤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다운타운이 자리하고 있음을 그림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삐 일을 하면서도 양육자로서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선호하는 거주 지역에 이른 아침 핑크와 오렌지빛이 섞여 내려오는 풍경의 공기감이 매우 아름답게 표현되었으며 작품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독자에게도 곧 등장할 주인공의 설렘 가득한 하루의 시작을 암시합니다. 아직 방 안에는 잠기운이 가득한지 문이 열린 틈으로 빛이 새어 들어옵니다. 따뜻한 커피 한잔으로 잠을 쫓고 아이를 깨우는 아버지의 다소 피곤한 표정과는 달리 두 눈을 번쩍 뜨고 신이 난 듯 일어나는 아이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다음 장을 넘겨보니 어디론가 떠나기 위해 배낭을 챙기는 모습이 학교를 가는 평일이 아닌 주말 혹은 방학 기간과 같은 신나는 하루의 시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정을 준비하는 과정을 묘사한 일러스트레이션을 보면 옷을 챙겨입고 짐을 쌓아 준비하는 열거식 그림이 등장하는데 동작과 자연의 소리를 생생한 의성어와 의태어만을 사용하며 별도의 텍스트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자세히 그림을 나열하는 소컷 일러스트레이션을 이용해 문자로 설명하지 않아도 바로 이해가 되도록 구성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애니메이션을 위한 캐릭터 디자이너로서 포트폴리오를 가진 작가의 경험이 현명하게 반영된 요소라 판단됩니다. 한편으론 문자로 설명하기가 어려운 자연의 스케일과 감동 같은 추상적이고 복합적인 감정 표현에 펼침면을 이용한 꽉 찬 일러스트레이션을 배치하며 두 캐릭터를 앞세운 이야기 중심의 삽화가 아닌 한 폭의 멋진 풍경화를 독자에게 선사합니다. 이는 애니메이션 배경 원화 감독이란 흔하지 않은 경험에서 태어난 은유적 시각 표현이며 구체적 답안을 제공하지 않고 독자가 느끼고 공감하는 일종의 여백을 지혜롭게 선사하는 화법입니다.
다채로운 동물과 식물을 관찰하며 두 주인공은 목표를 향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깁니다. 깊은 강을 건너기 위한 두려움을 아빠와 함께 극복한 뒤 만난 폭포의 경이로움과 간식 시간의 달콤함까지 정상에 도착하기 위한 즐거운 여정을 독자는 함께 즐길 수 있습니다. 여러 봉우리 중 자신들의 목표에 도달해 막연히 먼 산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무언가 의미심장한 분위기의 두 주인공은 묘목을 심고 넓은 자연 전경 속 일부가 되어 평온한 모습으로 하산하는 부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가족 사진첩을 정리하다 잠이 든 두 부자의 모습은 사실 실제 작가 자신이 아버지를 회상하며 작품을 헌정하기 위한 페이지이기도 합니다. 평소 그림책 애호가로서 유리 슐레비츠의 『새벽』에 담긴 세대 간의 사랑과 자연의 유대감이 좋았다면, 미국 서부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탕으로 현시대 가족에게 받은 영감들이 어떤 모습으로 새로운 그림책에 담겼는지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 되어줄 것입니다.
마지막 페이지에 “아빠에게 그리고 아버지께”라는 문구와 함께 어릴 적 자신의 모습과 현재 아버지가 된 스스로를 하나의 사진첩에 그려 놓은 작가는 현재 세 명의 자녀를 양육하며 그림책작가이자 애니메이터, 캐릭터 디자이너로서 바쁜 일정을 소화해 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그에게 가족과 자연이 선사하는 이야기들은 또 어떤 형태로 탄생할지 그의 다음 작품이 무척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류영선_그림책평론가, 『그림책 보는 기쁨』 저자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4년 1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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