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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U Nov 21. 2022

보편적 귀가

우리 모두 한번쯤 느껴보았을 보편적인 감정에 대하여

*해당 글은 실제와 무관하며 특정 상황을 가정한 픽션입니다. 재미로 보아주세요.


아무도 없는 사무실의 스위치를 달칵 내린다. 누군가 내려주기만을 기다린 듯 형광의 빛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금세 암흑과 적막만이 공기를 에워싼다.


아무튼 이 건물의 엘리베이터는 정말 나랑 안 맞아. 20층에서 버튼을 누르면 귀찮은 듯 1층에서 꾸역꾸역 올라오고, 1층에서 버튼을 누르면 하품을 쩌억 하며 20층에서 태평하게 내려온다. 이럴 때 보면 꼭 요청사항의 반대로 보고서를 만들어 오는 청개구리인 내 후배 같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스크를 잠시 내리고 녹초가 된 얼굴을 들여다본다. 고새 눈밑 지방은 축 처지고 입가 팔자주름의 골은 깊어진 것 같다. 오늘은 기필코 집 가는 길에 마스크팩을 사가리라 다짐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다짐은 집에 도착해 다 씻고 나서야 떠오르기 마련이다. 다시 나가긴 귀찮으니 구태여 다른 날에 비해 수분크림을 듬뿍 발라준다.


오늘따라 무겁게 돌아가는 회전문을 통과하니 바깥공기가 꽤 쌀쌀하다.

"추워졌네. 진짜 겨울이다."

평소엔 안 하던 혼잣말도 해본다. 건물을 올려다보니 12층 전체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다. 아직도 일하고 있는 얼굴 모를 12층의 전우들을 향해 찰나의 동정심을 느끼고는 옷깃을 여미며 빠른 걸음으로 전쟁터를 벗어난다.


야근 후 타는 택시는 꽤나 재미있다. 놀이공원을 가지 않아도 어트랙션을 즐길 수 있는 방법? 밤늦게 택시에 올라타 올림픽대로를 가로지르기! 막히지 않는 올림픽대로 위는 그야말로 F1 경기장이다. 건장한 풍채와 한 손으로만 핸들을 다루는 기사님의 택시를 탄다면, 그날은 엉덩이가 시트에서 떨어지는 진기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올림픽대로에서 바라보는 강북의 야경은 그야말로 야근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늦은 밤에도 여기저기서 빛나는 건물들을 보다가 대도시의 워커 감성에 젖어 자연스레 시티 팝을 귀에 꽂고 리듬을 타게 된다. 정신을 맑게 해주는 리듬에 푹 빠져있을 때쯤 들려오는 소리. '500m 앞에 목적지가 있습니다' 멘트가 들려오면 감성은 이만 접고 주섬주섬 내릴 준비를 한다.


이렇게 열심히 일을 했는데 그냥 집에 갈 수는 없다. 집 앞 편의점에 들른다. 평일 이 시간이면 항상 카운터에서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는 아르바이트생이 나를 맞이한다. 안면을 트는 걸 넘어 내적 친밀감이 생겨 다른 동네에서 마주치면 반가움에 포옹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맥주 한 캔과 아몬드 과자 그리고 혹시 안주가 부족할지도 모르니 컵라면도 하나 사본다. 안 먹으면 내일이라도 먹겠지 하며 계산대로 가져가지만 결국 그날 밤에 다 먹는다.


오래간만에 엘리베이터가 1층에 서있다.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회사 엘리베이터 흉을 봐준다. 복도를 가로지르는 나의 구두 소리가 꽤나 멋있게 들린다. 도어록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집에 배인 익숙한 냄새가 콧구멍을 간지럽힌다. 복합적인 원인으로 형성되어 그다지 나쁜 냄새도 그다지 좋은 냄새도 아니지만 어쩐지 심신을 안정시켜주는 효능이 있다. 이것이 향기 테라피?


거실에 외로이 기다리고 있을 야식들을 위해 샤워는 빠르고 간단하게 처리해준다. 어차피 먹을 거니까 양치질은 패스. 마스크팩을 안 사온 걸 깨닫고는 기억력을 의심해보지만 아무렴 어때 더 중요한 걸 사 왔는데. 야식을 모두 세팅하고는 본격적으로 먹을 준비를 한다. 시간은 늦었지만 넷플릭스는 빠질 수 없기에 뭘 보면 좋을지 고민하는 사이에 라면은 불어 가고 결국 아무 영화나 보다가 재미가 떨어져 유튜브로 넘어간다. 그러나 이도 금세 싫증이 나고 만다.


자취 10년 차. 어떤 일이 있어도 하루의 끝에 반드시 하는 루틴이 하나 있다. 다이어리에 그날의 날씨, 있었던 일, 감정 등을 간략하게 기록하는 일이다. 문득 이번 달에 쓴 일기를 쭉 읽어보고 싶어져 1일부터 차근차근 읽어 내려간다. 그리고 오늘 11월 20일.. 11월..20일? 아 참 오늘은 엄마 생신이다. 바쁘다는 이유로 깜빡해버렸다. 갑자기 차곡차곡 잘 쌓아 올려온 오늘 하루가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다. 맥주의 알코올 기운 때문인지 눈물이 퐁퐁 떨어지기 시작한다. 오늘 나름 완벽했는데.


아니. 사실  엉망진창이야. 회사도, 회사 엘리베이터도, 늙어버린  얼굴도, 저렴한 수분크림도, 배려 없이 과속하는 택시 기사도, 불편한 구두도, 불량 안주거리도, 자극적인 유튜브 영상들도. 그리고 가장 싫은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소중한 사람의 기념일을 잊어버리는 , 까맣게 잊어버린 딸에게 한마디의 서운함도 토로하지 않는 엄마까지. 새벽 세시, 하루를 나름  마무리했다고 생각했던 나는 결국 눈물과 함께 밤을 지새운다. 하지만 내일이 되면 아무 일도 없었던  다시 똑같은 하루를 반복하겠지. 그럼에도 지치지 말아야 ,  와중에도 행복해야 .


일상 속 작은 행복을 채굴하고 내 만족감의 빈칸을 채워가는 것이 하루를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지만.

대단한 행복이 없는 대신 대단한 불행도 없었다는 것에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이러한 감정들이 나 아닌 다른 누군가도 마주했을 보편적인 감정이라는 생각뿐이다.









상황

위 글은 '귀갓길'이라는 가상의 상황 설정으로부터 출발한 픽션입니다.


글 연재 패턴

1주차 - 신문 기사나 사설 등을 기반으로 다양한 사회 현안에 대해 글을 씁니다.

2주차 - 하나의 키워드를 설정하여 자유롭게 에세이 형식의 논픽션 글을 씁니다.

3주차 - 하나의 상황을 설정하여 자유롭게 소설 형식의 픽션 글을 씁니다. (본문 글은 여기에 해당)

4주차 - 콘텐츠 (영화, 드라마, 도서, 영상 콘텐츠 등) 를 보고 느낀 감상을 글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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