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무의식에 귀를 기울이며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당시 여덟 명이 한 방을 쓰는 기숙사에 살고 있었는데, 한참 잠에 들어있던 나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뭐라는 거지?’ 귀를 기울이는데 온 신경을 집중시키던 찰나, 정확히 귀에 박히는 목소리. “야야야.. 야!” 일반적인 목소리라고 하기엔 다소 울림이 있고 오토튠이 걸려 있는 듯했다. 순간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듣고 싶지 않아 귀를 막으려 하는데 어라? 두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 기지를 발휘해 손가락을 움직였다. 겨우 잠에서 깨어났다. 칠흑 같은 어둠 속 일곱 명의 친구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비슷한 현상은 최근에도 있었다. 이불을 돌돌 감아 머리에 베고 잠깐 선잠에 들었다. 문득 누군가 머리맡에서 걸어 다니는 것 같았다. 자취방에는 나 혼자뿐인데 자꾸만 발걸음이 느껴졌다. 분명 눈을 감고 있는데 방 안 구조가 시야에 들어오며 불길한 느낌이 엄습했다. 발걸음은 점점 빨라진다. 그러다 누가 기분 나쁘게 깔깔 웃는다. 웃음소리에 맞춰 발걸음은 달음박질처럼 빨라진다. 이번엔 손가락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혀를 냅다 깨물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도 안 되는 그 상황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이처럼 자다가 무서운 꿈에 질려 몸을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현상을 ‘가위눌림’이라고 한다. 여기서 ‘가위’는 ‘꿈에 나타난 무서운 물체나 귀신’을 뜻하는 전통적인 어휘이나 오늘날에는 완전히 쓰이지 않는 사어가 되었다고 한다. 가위눌림은 수면 장애의 일종으로 보며, 수면 중 의식은 깨어났으나 신체는 깨어나지 않은 상태일 때 겪게 되는 일종의 환각 현상이다. 원인은 스트레스 혹은 수면 부족으로 알려져 있다. 간밤에 나를 괴롭힌 건 귀신이나 무서운 사물이 아니라 나의 정신적 상태 또는 생활 습관이었다.
그런데 뭔가 석연치 않다. 가위눌림은 왜 무섭고 긴장되는 상황, 인물, 감각들이 동반되는 것일까? 몸은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어도 아름다운 분위기에서 평소 선망하는 아이돌 가수가 등장해 행복한 감정을 느끼는 가위눌림은 없는 걸까? 이런 주장도 있다. 가위눌림이 보통 공포적인 이유는 가위에 눌릴 경우 귀신을 보게 된다는 이야기가 흔히 퍼져 있고 두려움이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로 가위에 눌렸을 때 대다수가 공포적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 한국인들의 상상 속 귀신은 흰 소복을 입고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유형이 대중화되어 있기 때문에 가위눌렸을 때 그런 형상의 물체가 나타나는 것이고, 과거 서양에 서큐버스라는 악령이 유행했을 때 많은 서양인들이 가위에 눌리면 해당 악령의 형상을 목격했다고 한다. 귀신이 국경을 가려가며 사람들에게 등장하지는 않을 터. 대부분 수면 상태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은 우리의 무의식에 가깝다는 주장이다.
사람은 수면 상태에서 나타나는 현상들 (가위눌림이 될 수도 있고 꿈이 될 수도 있겠다)을 자주 해석하고 의미 부여한다. 하지만 수면 상태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은 결국 내 안에서 기인된다는 사실을 배제할 수 없다. 새롭게 해석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 자신을 해석해 출력된 결과물인 셈이다. 잠은 나를 무의식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 데려간다. 애써 숨기고 있던 내 깊은 무의식에서 이야기를 꺼내 하나의 영상물 또는 체험물로서 이를 경험하게 만든다. 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여력이 없을 때 가위눌림과 같은 현상들은 더욱 빈번하게 일어난다. 스스로에게 ‘이거 봐, 지금은 너 자신을 돌볼 때야’라 말하는 일종의 경고문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기숙사에서의 가위눌림은 매일 늦은 새벽까지 자습실에서 밤을 지새울 수험생 시기였고, 자취방에서의 가위눌림은 매일 같은 야근으로 인해 몸도 마음도 망가졌을 시기였다. 당시에는 ‘내가 기가 약해졌나 봐.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봐 이런 공포스러운 경험까지 다 하고 말이야.’하는 생각에 그쳤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의 내면에서 무언의 신호를 보냈던 것 같아 괜히 그 시절의 내가 안쓰럽다.
세상 밖은 여전히 시끄럽고 바쁘고 치열하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내면을 돌보지 못한다. 마음의 병은 감기처럼 금방 지나가겠지 생각하고 방치하거나 지나치는 법도 많고. 내가 진짜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깊게 대화할 시간이 부족하다. 나 자신 외에도 대화를 나눠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나의 무의식이 수면 시간을 빌려 나와 대화를 시도하는 듯하다. 야! 너 지금 힘들지? 너 지금 이게 걱정이지? 너 요즘 이런 거에 관심 많구나? 무의식은 나에게 해답을 주지는 않지만 정작 내가 놓치고 사는 것들을 비춰주는 거울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얼굴에 묻은 걸 닦기 위해선 거울을 통해 나 자신을 비춰봐야 하니까.
좋은 잠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시금 생각한다. “좋은 꿈 꿔”라는 말은 상대방의 안온한 잠자리를 빌어주는 말로 쓰이지만, 어쩌면 스스로에게 가장 먼저 건네야 하는 말이 아닐까?
키워드
위 글은 키워드 '꿈'을 가지고 자유롭게 써 내려간 논픽션 형식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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