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릴리포레relifore May 27. 2024

오랜만에 다시 만난 에쿠니 가오리

<한동안 머물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

얼마전, 아주 오랜만에, 20대 중후반을 함께 보낸 직장 동료한테서 연락이 왔다.

 “애들 도서관에 봉사활동 하러 왔다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을 보는데, 니 생각이 나더라.”

 몇 년만에 연락이 온 것 같은데, 그런 순간에 문득 날 떠올려주었다는 이야기가, 뭐랄까, 참 감동적이었다.


확실히 나의 20대는 ‘요시모토 바나나’와 ‘에쿠니 가오리’와 함께였다. 그 선생님의 메시지를 받는 순간 그 시기의 감정이 갑자기 되살아남을 느꼈다. 혼자 조용한 카페에 앉아 요시모토 바나나의 ‘데이지의 인생’을 읽으며 다이어리를 펼쳐 마음이 동요 하던 구절을 적던 그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때 좋아했던 달달한 바닐라라테의 향과 맛, 그리고 뭐랄까 그 나이만의 막막함과 외로움, 그리고 함께 일렁이던 낭만이 함께 마음의 수면 위로 올라왔다. 참 오랜만에 만난 지난 날의 ‘나’였다.


물론 두 작가 모두와 내 20대의 고요와 폭풍우치던 감정의  모든 것을 공유했었다. 내 감정을 책에서 들여다보면서 공감하고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하며 나를 토닥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30대가 되고, 아이를 키우면서, 현생에 치이면서는 두 작가와 잠시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녀들의 보석같은 묘사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뭐, 일단 문학을 보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고 해야하나. 그 감정을 잡고 단숨에 읽는 시간을 내기도 어려웠고, 쉽사리 빠지지도 않았다. 그러다 40의 언저리에서 아주 오랜만에 에쿠니 가오리를 만났다.




‘한동안 머물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라는 제목의 책은 산지 꽤 됐고 읽다가 멈추었는데(한번에 후루룩 읽히는데, 그게 아까워서), 요즘 다시 눈에 띄어 읽고 있다.


 그리고  확실해진 것이, 나는 요시모토 바나나 보다  역시 에쿠니 가오리인 것 같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이라는 말 대신에 ‘이제는’이라는 말을 써야할지도 모르겠다.


뭐가 되었든, 역시, 오랜만에 읽었지만, 금세 그녀가 펼쳐놓은 감성으로 풍덩 빠져버렸다. 그렇지. 아, 이랬었지 싶은 기분이 확 밀려오는 것이다.


독자를 사로잡는 필력도 그렇지만 그 섬세한 관찰력과 감성이란.

늘 놀랍고, 부럽고, 또 부럽다.




p.86 그림책은 한 권마다 독립적인 왕국 같은 것이라서, 늘 완성되어 있습니다. 그림책을 읽는다는 것은, 읽지 않았다면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던 그 왕국을 몸속에 소유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좋은 그림책을 많이 읽으면, 풍성하고 튼튼해지죠. 무서운 일입니다.


p.124 나는 밤에는 술을 마시든지 잠을 자고, 낮에는 일을 하든지 책을 읽습니다. 매일 아침 반드시 두 시간은 목욕을 하는데, 목욕을 하면서도 책을 읽고, 볼일이 있어 간혹 외출하지 않을 수 없을 때에도, 전철에서든 은행에서든 카페에서든 치과 대기실에서든, 때로는 길거리에서도 책을 읽습니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그 이야기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내 일은 소설을 쓰는 것이니 일하는 동안, 나는 그 소설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실을 사는 시간보다 이야기 속에 있는 시간이 훨씬 많죠. 벌써 오래전부터 그랬습니다.


예전에 나도 이야기 속에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았던 적이 있었다. 어느덧 아득한 이야기가 되었지만. 이야기 속에 있는 시간이 많다는 그녀가 참 멋지고, 부럽다.


P.129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곳으로 떠나는 일이고, 떠나고 나면 현실은 비어 버립니다. 누군가가 현실을 비우면서까지 찾아와 한동안 머물면서, 바깥으로 나가고 싶지 않게 되는 책을, 나도 쓰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나도 이 책을 읽는 동안 현실을 비우고 한동안 머물렀다. 그녀가 펼쳐 놓은 글 속에서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또 ‘아이들 주변 2’라는 글에선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린이들이 무대에 올라 의견을 말하는 행사를 견학하러 갔는데, 그때의 주제는 ‘어른과 아이 중 누가 득인가’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어른이 득’이라고 주장할 거라 예상했던 작가와 달리 아이들은 모두 ‘아이가 득’이라는 쪽에 손을 들었단다. 이유는 어른은 일을 해야 하고, 힘든 일이 많으며, 주택 융자금 걱정도 있고, 아이 키우는 것도 힘들다는 거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객석에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단다. 아이들이 하는 말은 전부 사실이었지만, 그 아이들이 딱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p. 165 그들은 어른이 될 테고, 그 사실을 그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나 즐겁지, 어른이 되면 괴로운 일만 많다고 생각하면서 어른이 되다니 최악이 아닌가.

 내가 어렸을 때는 주위에 즐거워 보이는 어른들이 참 많았다. (중략) 그들은 물론 ‘일’을 하고 있었고, ‘주택 융자금’도 ‘자식’도 있었다. 하지만 인생을 즐겼다. 어른에게는 어른의 세계가 확실하게 있었고, 나는 그 세계를 동경했다. 어른들은 참 좋겠네. 아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할 수 있는 그들은 멋졌다.


이전에 내가 관심을 둔 적이 없던 것이나, 파편적으로만 생각했던 부분을 이렇게 그녀의 글로 만나게 되면 그 특유의 관찰력과 세심한 묘사에 금세 동요되고 만다. 나였다면 같은 상황에서 ‘어린 시절이 즐거워서 다행이다’, 라고만 생각했을텐데. 그런데 그렇게 씁쓸하게 어른이 되는 일이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정말 동경할 수 있는 어른이 되어야겠네, 하고.

일단 인생을 즐겁게 사는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위해서도, 내 곁에 있는 두 아이와 교실에서 만나는 많은 어린이들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난생처음, 신문에 내 글이 실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