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까묵기에는 아까워, 하나하나 찬란한 곳이 가득한 이 곳, 붓-싼
허우대만 좋았던 라발스호텔에서의 잠자리가 썩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에 더해, 요근래 간간히 이야기가 들려오는 송정에도 지대한 관심이 있었던 나는 영도를 뒤로하고 송정으로 향하였다.
서울 촌놈답게 부산에서의 숙소를 고르는 데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은 오션뷰다. "바다 안 보이는 호텔 묵을거면 왜 부산에 가냐!" 와 같은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으나, 우습게도 송정의 거의 대부분의 숙소는 멋진 바다뷰를 갖고 있었기에 숙소 선택에 꽤나 어려움을 겪었다.
숙박객들의 평이 괜찮았을 뿐더러 "전객실 오션뷰!", "큼직한 욕조!"와 같은 키워드에 끌려 라온호텔이라는 곳을 예약하고 지체 없이 체크인을 하였다. 이 정도 가격대의 '호텔'이 풍기는 미묘한 모텔 느낌을 역시 지울 수는 없었으나, 청결하고 조용하고 훌륭한 뷰를 지닌 괜찮은 호텔임에는 틀림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크고 깔끔한 욕조가 있었던 덕에 저녁에는 무려 LUSH에서 산 입욕제로 제 딴에는 호사스런 목욕을 할 수 있었다.)
스페이스단단 마틴3호점
저녁 시간에는 센텀 근처에 일이 있어 간 김에 그 동안 벼르고 있던 스페이스단단 카페에 방문하였다. 카페의 입구에 다다른 순간부터 회백색 벽과 유려한 다기, 크리스탈 잔 등 나의 취향에 꼭 맞는 물건들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였으나, 문을 열고 입장하는 순간 귀를 때리는 큰 웅성거림에 나는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이런 "현대적" 인테리어를 자부하는 많은 카페들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현상이라 생각하지만, 소리가 부드럽게 퍼지지 못하고 모든 소음과 그 반향이 뒤섞여 굉장히 기분 나쁜 울림을 자아내고 있었기에 위에서 언급한 멋진 인테리어와 소품들의 가치가 급격히 퇴색되는 느낌이었다. (굉장히 귀여운 리트리버와 함께 온 견주분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귀여워~❣️"를 남발하고 있는 바람에 유달리 소란스러웠던 날일 수도 있겠다)
소음에 필요 이상으로 민감한 까다로운 성격 때문에 엄청 만족스러운 경험은 하지 못했지만, 나름 훌륭했던 와인과 빵도 맛볼 수 있었고, 멋진 인테리어를 보며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리기에도 좋았기에 추후 한가로운 시간대가 있다면 다시 한 번 방문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화려한 미디어 아트를 전시중인 공간으로, 이번 부산 방문에 꼭 가봐야지 했던 곳 중의 하나이다. 신비로운 음악이 전시장 전체에 흐르고, 눈길을 사로잡는 화려한 색채가 가득한 미디어 아트 작품이 가득하여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눈과 귀가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전시 전반에서 느껴지는 그 신비로운 분위기는 퍽이나 만족스러웠으나, 관람객의 8할 이상이 인스타그램에 올릴 멋진 사진을 찍기 위하여 고군분투하고 있어 마음 편히 관람을 하기 힘들었다는 점, 어떤 루트를 통해 구매하느냐에 따라 거의 두 배까지도 차이나는 변동적인 입장권 가격, 그리고 전반적으로 볼거리 대비 높았던 입장료로 하여금 남들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하기에는 역시나 조금 꺼려지는 곳이다.
나의 경우 폐장 한 시간 전에 방문하였기에 상대적으로 더 여유로운 관람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가장 저렴한 루트로 입장권을 구매하고, 늦은 시간대에 방문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번쯤 가봐도 좋을 곳이라 판단한다.
부산발 크래프트 비어 브루어리로, 송정에 자체 양조장을 두고 맥주를 생산하고 있는 곳이다. 양조장과 함께 펍도 운영하고 있어, 송정 바다의 파다를 즐기러 온 서퍼들은 물론, 왠지는 모르겠지만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들 또한 더러 방문하여 맥주를 즐기는 곳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는 듯 했다.
국내 유일의 사워 맥주 전문이라고 홍보를 하고 있는 만큼 보통의 브루어리펍에 비해서도 두터운 사워 에일 라인업을 지니고 있었기에, 사워 에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도 용기를 내어 여러 종류를 주문해보았다. 런던에 있을 시절 처음 도전했던 사워 에일은 시큼 씁쓸하여 다른 맥주 맛도 다 잡아먹어렸기에 다시 도전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지만, 이 곳에서 즐겼던 사워 에일은 그 때부터 이어졌던 거리낌을 해소해주었다. 찌르지 않는 정도의 새콤함이 오히려 입맛을 많이 돋구어 그 다음 맥주도, 또 그 다음 맥주도 계속 궁금해지게 하는 그런 마력이 있었다. 결국 나는 샘플러 이후에도 파인트 대여섯잔을 마셔버렸고, 중간에 부모님과 전화를 한 기억은 있으나 그 뒤에는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모를 정도로 거나하게 취해버렸다.
(그네들이 원픽으로 꼽는 '설레임'을 나 또한 원픽으로 꼽겠다.)
다음 번에는 미리미리 예약하여 양조장 투어도 꼭 해봐야지.
약간의 숙취가 남아있는 채로,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날의 아침을 맞이하였다. 부산에 왔으면 역시 돼지국밥을 한 번 쯤은 먹고 가야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개인적인 여행보다는 답사의 느낌이 강했던 방문이기에 직업정신을 발휘하여 근처에 점 찍어둔 카페에 가서 지친 속을 달래기로 하였다.
취향에 꼭 맞는 동양적인 인테리어가 인상적이라 가봐야지 했던 카페에 다다랐을 때, 입구에서 느껴지는 스산함에 나는 잠시 멈춰 서고는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뜨끈한 돼지국밥 한 사발을 해야할까-하며 고민하였다. 대략 4층 정도 되는 건물에 아직 공사가 진행중인지 대부분의 공간이 공실로 남아 있었기에, 벽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면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거 죽기 딱 좋은 날씨네"를 외치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근처에 평이 좋은 국밥집도 없었거니와, 괜한 승부욕이 발동하여 꼭대기 층까지 향하니 예상보다도 훨씬 멀끔한 분위기의 카페가 있었다. 한옥을 연상시키는 따뜻한 나무재질의 기둥과 다기들, 차분한 색의 벽이 어우러져 있었을 뿐더러, 어제의 카페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정숙함까지 있었다!
각종 다과가 담긴 도시락과 따뜻한 호지차를 한 잔 시키고는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 홀로 우아한 해장의 시간을 즐기고 있노라니, 문득 바다가 보이는 곳에 사는 사람들이 조금 부러워졌다.
168계단과 이바구마을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부산역으로 이동하였으나, KTX 탑승시간까지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던 터라 가깝게 걸어서 갈 수 있던 이바구마을로 향하였다. 워낙 산세가 험한 곳에 자리잡은터라, 마을의 아래와 위를 무려 168개의 계단이 이어준다 하여 유명해진 이 마을은, 168모노레일, 168 막걸리, 168 빵카페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곳에 168 숫자를 붙여 나를 더욱 열받게 했다. "진짜 계단이 168개일까?" 라는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기에 직접 방문하고 계단을 세보았으나, 가장 길게 이어진 계단이 168개일 뿐, 실제 마을의 꼭대기 까지 올라가려면 거진 300개에 가까운 계단을 올라야했다.
마을 꼭대기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부산의 전경은 가히 절경이라고 할 수 있었기에, 체력이 그래도 좀 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정도 수고스러움은 감내할만한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일상으로 복귀
2004년 첫 방문을 기점으로 몇 번이고 부산을 방문하였으나, 올 때마다 부산은 색다른 매력을 보여주고 즐거운 기억들을 새겨주었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이며, 바다가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서울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곳일 수도 있는데, 부산만이 가진 그 무언가가 다시금 나의 발길을 부산으로 돌리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