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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Sep 26. 2024

캐리어에는 먼저 책상을 넣었다.

0. 들어가며 마지막 : 사실 이 글은 여행기이다.

 2021년 6월, 길고 먼 산책을 위한 짐을 싼다. 최저가로 예매한 비행기에 실을 수 있는 짐은 총 21kg. 반팔 티 한 장은 약 300g이므로 옷 한 벌을 고르는 것마저 중대한 선택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선택의 중압은 여행에 가져갈 책을 고를 때 극심해진다. 쌓여있는 책들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서성였다.  

 집에서 대학교까지, 12분이 걸리는 지하철을 탄다. 운이 좋다면 12분 동안 만난 문장은 주어진 하루의 흐름을 만들어내고는 했다. 하루는 연습장을 넘기는 것처럼 시작된다. 새롭게 펼쳐진 한 장에 밑그림을 그리는 것은 대개 책의 문장들이었다. 하루가 순백색의 종이로 느껴진다면 예술을, 그것이 어떤 형태의 예술이던, 조금은 진지하게 대하게 된 것이 아닐까. 그래서 예술은 나의 생각과 행동에 균열과 파괴를 일으키고 나아가 변화를 발생시킨다. 하루의 페이지에 암송할만한 책의 문장이 남겨진다면, 만족할만한 나의 문장이 남았다면, 혹은 나의 내부 어딘가를 진동시킨 그림 혹은 음악 작품의 흔적이 남았다면, 결정적인 순간이 포착된 사진이 붙어 있다면, 나는 오늘을 충실히 살아낸 것이리라. 여행은 마치 끝을 알 수 없는 커다란 도화지와 같았으니 신중해야 했다. 지금 고르는 책은 어쩌면 꽤 커다란 밑그림을 그리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기분 좋은 압박에 책 고르길 미루고 있었음에도 캐리어는 가득 찼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1년 정도 모아두었던 돈으로 떠나는 여행이었다. 이탈리아 아래 지중해에 위치한 작은 섬인 몰타는 저렴한 영어학원을 등록하면 기숙사 형태의 저렴한 숙소를 예약할 수 있었다. 돈이 넉넉하지는 않았기에 영어학원에 딸린 기숙사형 숙소 중 가장 저렴한 곳을 예약했다. 룸메이트와 함께 사용할 나의 5평짜리 방에는 작은 책상조차 없었기에 약 3kg의 작은 침대용 책상과 400g짜리 휴대용 스탠드를 챙겨야 했다. 그러다 보니 책 고르길 미루고 있었음에도 캐리어는 가득 찼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고민없이 챙겼다. 책상을 챙기지 않으면 책을 대여섯 권은 더 챙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는 나의 손끝에서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했던 목소리를 명료하게 듣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책상이 필요했다. 되돌아보니, 버지니아의 울프의 문장 중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한 가지 의견, 즉 인간이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책상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입니다.”에 연필로 밑줄을 그어놨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한  채워지기 시작한 나의 작은 책장은 1 사이에 새로운 책이 들어갈 공간 없이  있다. 책장 안에는 나의 생각을 파괴하고 형성하고 다시 전복시키며 지난한 성장을 일으킨 책들이 꽂혀있었으므로 여행에 가져갈 책을 고르는 일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필요한 것만 챙겼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여행가방이 가득   권의 책만을 챙겼다. 그리고 노트북 하나, 책상 하나, 스탠드 하나, 일기장 하나, 연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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