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를 읽고
우리는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 얼굴에 파란 멍이 빠질 날이 없는 가정에서 태어나, 매일 집에서 보는 것은 초록색 병이 다인 청소년기를 보낸 인간. 자기 이름 세 글자보다 또래에게 ‘가난충’이라는 말을 더 많이 들은 인간. 그러한 인간도 도둑질을 하면 처벌을 받는다.(물론 환경을 어느 정도 참작하기는 할 것이다.)
어떻게 이런 불우한 환경을 지낸 사람에게 벌을 줄 수 있을까? 만약 인간이 환경 변화에 수동적으로 끌려다니는 존재라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운이 없어서 범죄를 저지른 것이 된다. 만약 인간이 그런 존재라면 우리는 정의를 내세워서 그를 벌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그저 운이 없어서 나쁜 상황에 내몰렸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같은 상황에 처하면 같은 일을 저지를 것인데 어떻게 그것에 벌을 줄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는 정의의 이름으로 법을 집행한다. 인간은 상황에 상관없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빅터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극단적 상황 속에서 인간의 정신적인 변화를 탐구한 책이다. 그는 아우슈비츠라는 희대의 비극 속에서 인간의 행동을 관찰했다. 책의 일부만 가져와도 그 비극성을 깨달을 수 있다.
“한 남자가 상처나 부종 혹은 열 때문에 앞으로 이틀간 수용소 안에서 가벼운 일만 할 것을 허락받기 바라며 병실로 찾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12살짜리 소년이 실려 들어왔다. 눈 속에 차렷 자세로 여러 시간 서 있었거나 아니면 수용소 안에 맞는 신발이 없어서 맨발로 밖에서 일해야 했던 것 같다. 그는 그것을 무감감하게 바라보았다. 소년의 발가락은 이미 동상에 걸려 있었고, 의사가 집게로 시커멓게 썩은 살을 하나씩 끄집어냈다. 하지만 그 광경을 바라보는 우리는 혐오감과 공포, 동정심 같은 감정을 더는 느낄 수 없었다. 사람들이 괴롭힘을 당하거나 죽어가거나 또 이미 죽은 것을 너무나 일상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죽음이 일상이 돼, 고통이 익숙해지고, 인간에 대한 존엄도 없어진 상황 속에서 놀랍게도 사람들은 각기 다른 태도로 각기 다른 행동을 하며 살아간다.
누군가는 쾌락에 몸을 맡겨, 삶을 살아가기도 하며. 누군가는 유대인임에도 간수가 돼, 같은 유대인들을 핍박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런 상황 속에서도 타인에게 자신의 빵을 나눠주는 사람도 있었다.
“강제 수용소에 있었던 우리들은 막사를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아주 극소수였는지도 모른다. ”
극단적 폭력이 횡횡하는 수용소에서도 간수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사디스트 기질이 있어서 수감자들을 괴롭히면서 쾌감을 느끼는 인간들도 분명 존재했다. 악마들이 있는 와중에 보통 간수들은 무감각해져 수감자들을 크게 핍박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동정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사비로 약을 사서 수감자들에게 매긴 간수들도 존재했다. 수용소에 한 소장은 많은 양의 사비를 털어 수감자들을 위해 돈을 사용했다.(이러한 행동은 조국에 대한 배신으로 여겨져 사형을 당할 위험이 있다.)
인간의 육신을 묶고, 굶기고, 고통스럽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이 개인에게서 뺏어갈 수 없는 것이 있다. 책에서는 이를 환경을 받아들이는 ‘태도’라고 봤고, 의미를 생각해 내는 ‘자신’이라고 얘기했다. 인류 최악의 수용소에서 누군가는 괴물이 됐고 누군가는 가스실로 들어가면서도 가족에 대한 사랑을 역설했다.
그냥 유전자가 그런 식으로 설계돼 있다고 보는 유전자 결정론을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고 생각한다. 저 끔찍한 삶 속에서도 마음속에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고 본다. 인간은 자기 초월이 가능한 존재라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스피노자의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려고 한다.
위대한 것들은 그것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실현시키는 것도 힘들다.(스피노자 <윤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