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은 마냥 장밋빛이 아니다.
바라나시에서 온 편지
오레키 호타로에게
좀 늦었지만 고등학교 합격한 거 축하해.
무사히 고등학생이 된 너한테 누나로서 충고 하나 해 줄게.
고전부에 들어가.
고전부는 가미 고의 전통 있는 문예계 동아리야.
네가 아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속해 있던 동아리이기도 하고.
듣자 하니 전통 있는 우리 고전부가 삼 년 연속으로 신입 부원이 없어서 현재 부원 수는 제로.
올해도 신입 부원이 없으면 자동적으로 없어질 거라지 뭐야.
호타로, 누나의 청춘이 깃든 고전부를 지켜 줘.
일단 이름만 둬도 되니까.
어차피 하고 싶은 일도 없잖아?
뉴델리에 도착하면 전화할게.
이만 총총.
오레키 도모에
누나의 부탁으로 고전부 부실을 찾아간 "오레키 호타로"
개인적인 사정으로 고전부에 가입한 "지탄다 에루"를 만난다.
고교 생활하면 장밋빛,
장밋빛 하면 고교 생활
회색을 선호하는 인간도 있거니와,
심지어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조차
그런 인간은 적지 않다.
하지만 그거,
꽤나 쓸쓸한 인생이다.
안 해도 되는 일은 안 한다.
해야 하는 일은 간략하게.
에너지 절약 주의자 다운 신조를 실천하던
오레키 호타로.
하지만 모든 일에 신경을 쓰는
지탄다를 만남으로써 평소라면 하지도 않을
"남의 궁금증을 해소시켜주는 일"을 하게 된다.
호타로의 귀차니즘을 잘 알던
친구 후쿠베 사토시.
호타로의 새로운 모습에 흥미를 느낀다.
그리고 사토시를 짝사랑해온
도서 위원 이바라 마야카까지.
두 사람이 더 고전부에 가입함으로써
네 명의 학생이 고전부의 전통을 잇게 됐다.
지탄다가 신경 쓰이는 일을 가져오면
호타로는 귀찮아하며 해결한다.
거절했다간 더 귀찮아질 테니 말이다.
지탄다는 그런 호타로에게서
궁금한 건 무엇이든 답해주던 삼촌이 겹쳐 보인다.
그리고 그녀가 오랫동안 품어온 의문을,
오레키라면 풀어내지 않을까,
내심 기대해 본다.
제가 오레키씨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건...
제가 삼촌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기억나게 해 달라는 거예요.
그녀 삼촌의 이름은 세키타니 준.
그 역시 과거 고전부였다.
지탄다는 어릴 적 고전부 문집을 발견하곤
삼촌에게 문집 제목인 <빙과>의 뜻을 물었다.
...
삼촌의 대답을 들은 그녀는 엉엉 울고 만다.
삼촌은 그런 자신을 달래주지도 않고
가만히 굳어 있었다.
그 후 세키타니 준은 인도에서 행방불명이 되고
올해로 7년째, 법적으로 사망처리되기 직전이었다.
다시는 보지 못할 삼촌을
당시 충격으로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지탄다는 다시는 보지 못할 삼촌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기억하기 위해
과거를 파헤치고 있었다.
그녀를 도와야 할까.
어쩌면 한 사람의 인생관이 달린 문제일 수 있다.
그녀가 괜찮다 해도 실패하면 죄책감이 생길 게 뻔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 양식이다.
안 해도 되는 일은 안해왔다.
하지만
어디 있는지, 얼마나 깊은지도 모르는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어린아이가 눈앞에 있다.
호타로는 그녀의 의뢰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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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고전부 네 명은
지탄다의 삼촌 세키타니 준에게
33년 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밝히고자 모였다.
일주일 간 각자의 방법대로 조사를 한 후
한데 모여 자신만의 추리를 발표한다.
1. 지탄다 에루
추측 : 1967년 10월, 세키타니 준은
돈을 갈취하기 위해 축제를 방해한 이들과 싸웠다.
싸움 끝에 축제는 정상적으로 거행된다.
다만, 폭력을 휘두른 책임을 지고
그는 학교를 떠났다.
반박 : 애초에 축제에서 장사 활동은 불가능.
돈이 아니라면 외부인이 축제를 방해할 이유가 없음
그 밖의 이유가 있더라도 당시는
전국적으로 학생운동이 들끓던 때인 만큼
한낱 축제를 방해하려는 외부인은 없을 듯 함.
2. 이바라 마야카.
추측 : 지탄다의 주장과 다르게
분쟁이 일어난 시기는 6월.
그 분쟁은 "반관료주의적 자주성"을 띄는
즉, 학생과 교사 간의 갈등이었음.
"과감한 실행주의"라는 말을 통해
물리적 충돌이 있었음을 알 수 있음.
반박 : 우선 주장이 너무 추상적임
여기서 나온 분쟁과 빙과 서문에 나온 싸움과
같다는 보장이 있을까?
싸움은 6월, 퇴학은 10월인 이유는?
3. 후쿠베 사토시
해석을 하자면
1. 운동에서 폭력은 사용되지 않았다.
2. 전교생에게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사토시는 대부분의 추측에
잡다한 배경 지식으로 논리적 반박을 했으나
"데이터베이스는 결론을 낼 수 없거든."
이란 말과 정작 자기 주장은 함구한다.
4. 오레키 호타로
호타로가 찾은 자료는
<가미야마 고등학교 오십 년의 발자취>
얻을 수 있는 거라곤
"1967년 6월, 축제 관련 논의가 있었다." 뿐.
이것만으론 주장을 만들기 어렵다.
결국 호타로는 모든 자료들을 가지고
화장실로 빠져나간다.
네 개의 자료.
그리고 지금까지 나온 말들.
그것들을 하나로 엮을 수 있는 추정은?
...
호타로는 결국 한 가지 결론을 얻었다.
<호타로의 추리>
1967년 6월,
축제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아마도 기간을 줄이겠다는 내용.
(호타로의 자료)
학생들은 이에 크게 반발한다.
그리고 세키타니 준이라는 지도자가 나온다.
(이바라의 자료)
학생들은 비폭력 운동은 벌였다.
아마도 수업 보이콧이나 대자보 등.
(사토시의 자료.)
결국 축제는 원래대로 닷새간 진행.
학생들의 자주성을 지킨
세키타니 준은 영웅이 되었다.
(지탄다의 자료.)
하지만 분쟁은 6월에 일어났는데,
세키타니 준의 퇴학은 왜 10월에 이뤄졌나.
한창 학생운동이 과열될 때
지도자를 퇴학시켰다간
감당 못할 일이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축제가 끝나고 열기가 사라진 10월 말
교사 측은 세키타니 준을 퇴학시켰다.
(오레키의 추측)
즉, 세키타니 준은
자신의 고교 생활을 맞바꾸면서
축제(간야제)를 지킨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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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사토시는 호타로에게 묻는다.
왜 화장실에 들어가서 고심할 정도로
이번 일에 적극적이었는지.
평소에는 그 어느 것에도 흥미를 갖지 못한 채
흘러가는 대로 살아오던 호타로였다.
스스로 회색 인간이라 자조하기도 했다.
장미는 필 장소를 얻어야
비로소 장밋빛이 될 수 있다.
나는 적합한 토양이 아니다.
그뿐이다.
하지만 고전부에 들어가 지탄다를 만났다.
그녀와 여러 일을 해결했다.
그러다 문득,
자신 또한 장밋빛을 동경한다는 걸 깨닫는다.
너희를 보다 보면 가끔씩 마음이 불안해질 때가 있어.
... 그러니까 최소한, 그 뭐냐.
추리라도 해서 한몫 끼고 싶었던 거야.
너희 방식에.
호타로 넌 장밋빛이 부러웠어?
... 그럴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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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온 호타로는
누나가 이스탄불에서 보낸 편지를 읽는다.
"십 년 뒤 지금 이 시간을 후회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누나에게 걸려온 전화.
이미 세키타니 준에 대해
알고 있는 듯한 오레키 도모에(누나)는
33년 전 사건을
"비극"이라고 표현했다.
방에 돌아온 호타로는 다시 생각한다.
장밋빛이라 일컫는 고교 생활.
세키타니 준 한낱 학교 축제 때문에
퇴학을 당하고 인생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그는 정말 33년 전을 후회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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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주의
오레키 씨, 저 이 일에 관해 아직 알아야 할 게 있는 것 같아요.
지탄다의 말이 맞다.
모임에서 나온 최종 추리에는 보충해야 할 것이 있다.
하지만 우리끼리 더 얘기한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으리라.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면 된다.
빙과 2호의 서문을 쓴
고리야마 요코.
이바라가 도서 위원으로 있는
도서관 사서 분께.
제가 여쭤 보고 싶은 건 한 가지입니다.
세키타니 준은 자발적으로 전교생의 방패가 된 건가요?
질문은 받은 선생님은 잠시 침묵했다.
"정말 모든 걸 꿰뚫어보는 듯 하구나."
그리고 그녀는 33년 전의 진실을 알려주었다.
33년, 축제 축소 계획에 반대하기 위해
운동을 이끌 지도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각 동아리의 대표가 모인 자리에
아무도 입후보를 하지 않았다.
다들 처벌을 받기 두려웠던 것이다.
그때 등 떠밀린 학생이 바로 세키타니 준이었다.
실질적인 운영은 다른 사람이 했지만
표면적으론 세키타니 준을 중심으로
거센 학생 운동이 벌어졌다.
그러다, 운동이 절정에 다다를 때
캠프파이어를 벌이다 인근의 체육관에 불이 붙었다.
다행히 큰 불로 번지진 않았으나,
교사 측이 학생운동을 문제 삼을 때
그들은 아무말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축제가 끝난 10월
세키타니 준은 대표라는 이유로 퇴학을 당한다.
그리고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렇게 세키타니 준은 떠나기 직전에
문집의 제목을 <빙과>로 해달라고
요코에게 부탁을 했다.
하지만 사서 선생님은 그 의미는 모른다고 한다.
지탄다, 사토시, 이바라 모두 모르는 눈치이다.
...모르겠다고?
세키타니 준은 우리 같은 고전부의 후예들한테까지
자신의 심정이 전해지도록 한 거다.
문집 제목에 담아서 말이지.
빙과
영어로는 아이스크림
세키타니 준은 지금의 억울함조차
몇 년만 지나도 모두에게 잊힐 거라 예감했다.
그러니 자신의 처지에서 할 수 있는 발버둥을,
자신의 심정이 담긴 최후의 말을
후세에게 전한다.
아이 스크림
i scream
나는 절규한다.
생각났어요.
전 삼촌께 '빙과'가 뭐냐고 여쭤봤어요.
그랬더니 삼촌은 제게...그래요.
강해지라고 말씀하셨어요.
제가 만약 약하면 비명도 지르지 못할 날이 올 거라고.
오레키 씨.
전 산 채로 죽는다는 게 무서워서 울었던 거예요.
다행이에요.
이제 삼촌을 떠나보내 드릴 수 있겠네요.
호타로는 이제껏
그 무엇에도 흥미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스스로를 자조하기도,
장밋빛 생활을 동경하기도 했다.
그는 세키타니 준의 진실을 안 후부터
삶이 마냥 장밋빛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을,
남을 따라 하기만 하는 무색이 아니라
자신만의 색이 있다면 충분하다는 걸 깨닫는다.
무엇보다 그는 자기 자신을 받아들인다.
요네자와 호노부.
일본의 추리 소설가이다.
1978년 출생으로, 빙과의 배경이 되는
다카야마시에서 나고 자란다.
대학생 시절, 첫 작품 <빙과>를 발표하고
2001년 제5회 가도카와 학원 소설 대상에서
빙과로 미스터리&호러 부문 장려상을 수상한다.
이후 청춘 미스터리 소설을 잇따라 발표하며
인기 작가로서 주목을 받으며,
왕성한 집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고전부"라는 이름답게
고전 미스터리 소설에 대한
차용 또한 많은 작품이다.
1. 「시간의 딸」
병원에 입원한 경찰 그랜트가
역사 기록을 통해
500년 전 리처드 3세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이야기.
부제(the niece of time) 또한
이 책을 따왔다.
https://blog.naver.com/abom_bookstore/223407237409
2. 「독 초콜릿 사건」
독 초콜릿을 먹고 사망한
벤딕스 부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여섯 명의 탐정이 진실을 밝히는 이야기.
한 명의 명탐정이 추리하는 것이 아닌,
한 사건을 여러 사람이 다각도로 바라보며
제일 올바른 추리를 찾아가는 방식을 차용했다.
https://blog.naver.com/abom_bookstore/223409319248
3. 「셜록홈즈 시리즈」
작가 본인이 셜록 팬이라 한 만큼
<빙과>의 인물들에도 그 팬심이 드러난다.
뛰어난 추리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호타로는 셜록홈즈.
탐정의 친구 그리고 보좌관이기도 한
사토시는 존 왓슨.
끊임없이 사건을 가지고 오는
지탄다는 의뢰인.
헛발질하고 호타로와 싸우기도 하는
이바라는 레스티레이드 경감.
호타로의 누나이며 머리가 뛰어난
오레키 도모에는 마이크로프트.
홈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속성이
빙과의 등장인물에 흡수되었다.
"십 년 뒤 지금 이 시간을 후회하지 않을 거야."
지금의 선택을 십 년 뒤에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진로를 정해야 하는 시기인 만큼
질문에 답하기 어려웠다.
아직은 별로 안 살아봐서 혹은,
모르는 것이 더 많아서 어려운 것도 있다.
그럼에도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거나
현재의 마음이 나중엔 전부 상관없다는 식의
목적론적인 주장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
모든 것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주관성을 잃고 역사가 된다.
하지만 그 역사에 다시 주관성을 불어넣는 건
바로 현재의 자신이다.
십 년 뒤 과거를 되짚어 볼 때
'나는 후회하지 않을 시간을 보냈구나'
라고 생각하기 위해선
희생 없는 현재들이 쌓아야 할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도 주관성을 빼앗기지 않을,
'나 여기 있다고' 소리치는 글을 쌓아간다.
나는 오늘도 이 하루를 후회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