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8~23 장 <용문사와 해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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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땅이 멀리 있기에 임진년에 왜적들이 남해 앞으로 돌아가면 전라 수영이 있고 물길이 더욱 험하고 뭍에 내려도 서울이 많이 멀어지는 까닭으로 노량 목으로 질러 들어와 뭍에 내리면 서울 길도 가깝고 다시 병수영 꺼릴 데가 없기에 왜적들이 일부러 노량 목으로 들어와 다투던 일이 과연 지형이 그러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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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한때 귀양으로 와 있지만, 벼슬하는 몸으로 온 후에는 각처 관방 지형과 백성의 심한 고통을 평소에 유의하여 보는 것이 옳으니, 금산 올라 구경할 적에 사람들이 바위나 수목들이나 구경하고자 가리키며 말하기를, 내 길이 멀고 가까움이나 물과 뭍이 험하고 쉬움을 묻고 살피며 첨사와 만호를 앉힌 지형을 살펴보니 남해 한 섬이 경상 전라 두 도 사이에 있어서 과연 나라의 요충지가 되어 남방의 큰 관문이 되었으되, 한 현감을 두어 대수롭지 않게 여겨 예사로운 고을처럼 내버려 두었으니 이런 일은 성근 근심이 있어라. 금산 서쪽을 바라보니 용문사가 있으니 큰 절이더라. 내 평소 절 구경을 무심히 여기되 용문사의 산세 도국(都局: 도곡)이 매우 좋아 보이기에 잠깐 절 구경하려 하노라 하고 그리로 가서 산세와 깊고 큰 골짜기(洞壑)를 살펴보니 사면으로 석각이 높고 험하여(차아하여) 뚜렷한 성곽이 이루어져 한 곳도 허술한 데가 없고 그 속에 큰 내(대천)가 있어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大旱不渴)고 하고, 물 들머리(水口)에 십여 칸 너비나 터져 있으니 짐짓 산성을 만듦직 한 땅이더라. 산성 만들려 하면 산 위에는 저절로 생긴 성곽이 있고 수구 십여 칸을 잠깐 막아 쌓는다면 옛사람이 말한바, 한 사람이 문을 막고 있으면 일만 사람이 열지 못할 땅이더라. 성을 쌓고 창고를 지어 곡식을 쌓아 두었다가 평시나 전시에 충무공 같은 이에게 맡겨 둔다면 물에 나가서 싸우고 성에 들어와 지키면 바다 쪽의 형편이 과연 좋아 보이되, 근래 사람들이 이런 것에 염려가 적으니, 이를 보았으나 일컬어 말할 것이 없고 사리에 어둡고 세상 물정 모르는(迂闊) 선비의 말을 누가 채택하여 쓰겠는가(採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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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안 특산물(物産)은 전복 홍합 미역 종류가 있어서 매번 장날이면 진열해 놓는 것이 다 생선류이고 또 입는 것들은 무명 모시 삼베 명주가 다 있되 풍속이 무명과 모시를 특히(별노) 더 높게 치고(슝샹하고) 명주는 드물게 한다고 하더라. 읍이나 촌 여인들이 치마를 물들이지 않고 입기에 물으니 서울로 보내며 물 들리기에 천 리 길이 어려워 흰 것으로 입는다고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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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주인집에 해녀(鮑作)가 생복을 이고 왔거늘 내 종에게 시켜 사라하고 말하기를 불쌍한 해녀이니 값을 달라는 대로 주라 하고 해녀에게 묻기를 너는 어디 살며 생복을 어디서 잡느냐고 물으니, 저희가 살기는 읍내서 수십 리 되는 한 갯가에서 살고 생복은 물길로 오륙십 리 혹 백여 리를 들어가 캐고 멀리 갈수록 더 굵다 하고, 다른 사람들이 말하기를 생복 따는 짓(거동)을 보니 해녀들이 겨울이라도 옷을 벗고 물속에 개구리처럼 뛰어들어 물속에 거침없이 빠져 있다가 수 식경이 지난 후 도로 나와 바닷물 위의 뒤웅박에 닿아 엎드려 숨이 북받쳐 숨을 도로 들락날락하고 겨우 쉬었다가 즉시 또 들어가 따내어 오니 해녀의 하는 짓(거동)이 극히 불쌍하고 생복 하나의 값이 여러 냥 싼지라. 서울 양반님네 그런 일을 모르는 이가 많으신데 나리는 불쌍한 줄 아시니 고맙습니다(고마오시다) 하더라. 원이 나와 보거늘 해녀의 불쌍한 말을 일컫고 옛말을 일컫기를 우리 외숙 한공(한억증을 가리킴)이 제주 어사로 갈 때 대궐에 들어 임금을 뵙자오니(入侍) 나라에서 바다 섬(제주도를 가리킴) 백성의 노고를 걱정하시어 생복 따는 불쌍한 말씀을 거듭 일컬으시니 옛사람의 시에 이르기를 소반 가운데 밥이 쌀 낟마다 맵고 쓰다(辛苦)고 일렀으되 나는 소반 가운데 대생복이 낱낱이 맵고 쓰다고 이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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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교 하오시니 우리 성상께서 구중궁궐에 계시어 천 리 밖 어민의 고통을 친히 보시는 듯 이렇듯 하시니 관찰사(방백 수령)가 되었으니 백성에게 가까운지라 더욱 청렴함 직하다 하니 원의 대답도 그렇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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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에 사슴이 많아서 이전에 본 현에 녹용 두 대 진상이 있어서 매번 사냥(山營)할 때 민폐가 몹시 심하니 칠팔 년 전에 어사 이휘중(李徽中)이 임금께 보고하여 녹용 잡는 폐단을 자세히 아뢰니 윗지방까지 녹용을 공물로 바치게 하고 남해 진상을 말게 하시니 막중한 약방에 쓰이는 것을 이리 변통하여 어민을 고통을 걱정하시는 일이 극진하시니 백성에게 성은이 미칠 뿐 아니라 은혜가 섬 속 짐승에게도 미쳤으니 성탕(은나라 태조 탕왕을 가리킴)의 덕화와 같다고 이를 수 있겠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