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3 ~ 40 장<접객과 빈곤, 교우와 벼슬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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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이후에 어떤 사람이 와서 보고 싶다고 하여도 내 사양하고 보지 않았으나 우리 동성 류씨들이 진주, 하동에 있기에 서너 사람이 걸어 섬 속에 오는 일이 그저 보내기 어려워 보고 대접하여 보냈더니, 하동 있는 류생이라 하고 와서 보기를 청하되 저희 본관(姓貫)이 문화요 전주 동종이 아닌지라 못 보고 보내니 박절하게 여기더라. 하동 있는 동종 몇 사람이 와 보고 홍합과 고사리를 가져와 받기를 간청하기에 마지못해 고사리를 받고 홍합은 도로 주어 보내니 다른 사람이 묻거늘 내 이르기를 그 사람의 집이 물가가 아니고 지리산 밑이라 홍합은 사 온 것이니 받지 못하고 고사리는 동산에서 꺾은 것이니 받았으되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하니 대답하기를, 고사리는 백이 숙제도 먹었다 하고 크게 웃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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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리(敎理: 조선시대 집현전 등에 둔 정5품 관직) 사처 바깥에 앉아 있었는데, 마침 유교리의 집안 편지가 오니 본 후에 말하기를, 집안은 무사하나 빚도 얻지 못하여 조석이 어렵다고 하였으니 우리의 가난이 어려운지라. 노형을 이전에는 데면데면 알았기에 가난한 줄 대충만 알고 자세히는 모르거니와 그리 심히 어렵지 아니한가 하거늘 내 대답하기를 나는 이제(시방) 서울에도 시골에도 집이 없어서 동서남북으로 남의 집을 빌고 다니니 옛사람의 사람의 “내년에는 또 어느 곳에 있을 줄 알지 못하여라.”라는 말이 짐짓 내 형편이로다. 몇 년 전에 광주 팔곡에 가 있을 때 양식이 없기에 관대를 팔아 장에서 보리를 사다가 늙은 아내가 손수 방아를 찧어 밥을 지어놓고 웃으며 말하기를, 원 지내고 급제하였으되 가난이 점점 더하여 이전 못 먹던 보리밥을 억지로 드신다(자신다)고 하거늘 내 절구 한 수를 지으니 시에 말하기를
35 매각조의환맥귀賣却朝衣換麥歸하니(조복 팔아 보리 사서 돌아오니)
36 황주삼일가중기荒廚三日可中氣로다(거친 부엌에 사흘은 요기하겠구려)
37 산처막소신모졸山處莫笑身謀卒하라(산속 생계가 졸함을 비웃지 말지라)
38 십곡다시사이비十斛多時事易非니라(열섬 더 많으면 그르치기 쉬우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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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에 전사옹(田舍翁: 고루한 시골 늙은이)이 보리 열 섬을 더 장만하면 아내를 바꾼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그 말을 일컬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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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지어놓고 온 집이 크게 웃었으니 이 한 글에 형편을 족히 알겠다고 하니 유교리 듣고 말하기를 안빈하던 일도 좋거니와 글과 말이 다 좋다 하고 일기에 베껴 집에 가 노친께 뵈려 하노라고 하니 웃고 지내니라. 유교리가 이따금 왕래하여 담소하니 나에게 말하기를 이 시절 친구(儕輩) 사귀기 어려우니 어떤 사람을 취하냐고 하거늘 내 대답하되 내 성품은 남과 달라 벗 구하기를 부귀 극진하여도 취하지 않고, 문장이 이름나도 취하지 않고 언론이 추상같아도 취하지 않고 다만 그 집안이 효우행실이 있는 듯하면 사귀노라고 하니 유교리가 마침(때) 좋은 말이라고 하고 그 후 벼슬자리 옮기는 일(去官)의 도리를 의논하다가 내 말하기를 어느 벼슬을 조심하지 않겠는가마는 만일 의주 동래 원이거나 관서 영남 감사나 혹 남북 사신이거나 이런 벼슬들은 타국과 서로 교류하니 다른 벼슬과 다른지라 자기 단속(律己)에 더욱 청백 엄격하게 하여야 다른 벼슬보다 열 배 조심할 것이라. 만일 그렇지 못하면 타국이 가벼이 여김이 이편에 한 몸뿐 아니라 조정에 사람이 없다고 여기기 쉬우니라 하니 유교리가 대답하되 이 의논이 더욱 좋다고 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