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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Y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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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파스 Y Mar 13. 2024

내 위쳐 돌려내-2

나에게 아름다움을 강요하지 마세요

1+1=2다. 2+2=4이다. 

이것은 만고의 진리다. 이것은 옳은 것이다. 새뇌를 당한 것이 아니라 수학적 원리를 학습과 이해를 통해 습득하게 된 지식이다.

따라서 2 그리고 4라 답을 적지 않으면 오답이 된다. 당연하다. 여기에 딱히 다른 이유는 없다. 그저 그것이 옳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 장난 삼아 1+1=창문이라 말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혹은 2+2=덧니라 얘기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이는 상당히 창의적이다.


먼저 창문이라 답하는 건 숫자와 기호가 가진 형태를 가지고 해석한 것이다. 문제 '1+1='을 적을 때 '='표시를 1+1의 위아래로 배치시켜 얻게 된 형태는 田이다. 흔히 창문을 그리면 나오는 형태를 얻게 되는 것이다. 형태를 가지고 수식을 해석한 참신함이 있다. 어쩌면 미술을 하는 아이들이 가진 재능 아닐까?


이어서 덧니라고 답하는 것은 2를 발음할 때 이(치아)를 가리키는 중의적 표현에서 힌트를 따와 두 치아가 덧대는 것이니 덧니라고 해석한 것이다. 참 문학적으로 기발한 상상력이지 않은가!


사실 이러한 해석은 기발하고 재밌지만 정답이 될 수는 없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은 정답이 아닌 것이다.


별 것도 아닌 사실을 뭐 이리 장황하게 썼겠냐 싶겠지만 실은 요즘 시대가 이러한 농담, 우스갯소리에 목숨을 걸고 진지하게 대하는 것 같아서다.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이유로 말이다. 이는 마치 수학시험에서 창문과 덧니를 적은 아이들이 '차별'을 받으면 안 된다며 정답처리를 해달라는 모습과 같다.


기존에 당연히 여기던 것에 대해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공주는 왜 이뻐야만 하는가? 왜 백인이어야만 하는가? 왜 주인공은 잘생기고 예뻐야만 하는가? 예전에 여신의 모습은 작고 뚱뚱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이는 발견된 조각상을 통해 알 수 있지 않은가? 미의 기준은 시대마다 다르며 앞으로의 시대에는 새로운 미의 기준이 세워져야 한다고 얘기하며 기준을 허물고 있다는 것이 이들에 대한 나의 생각이다.



그것 참 아름답다! 그 사람 참 아름답게 생겼어! 우리는 눈에 들어온 어떤 사람 혹은 어떤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다.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아름다움은 비례에서 온다. 눈과 눈사이의 비례, 코와 입 사이의 비례, 눈 너비와 입술너비의 비례, 얼굴과 몸의 비례 등 우리가 봤을 때 아름다움을 느끼는 비례가 있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지만 누구나 '아.. 괜찮다...!' 하고 느끼는 비례가 있다. 이 비례를 잘 갖추고 있는 사람일수록 우리는 그들을 보며 아름답다고 느낀다. 얼굴에 있는 눈코입의 비례가 잘 잡혀있는 사람은 잘생겼거나 예쁘게 보이고, 팔과 다리, 몸과 얼굴의 비례가 좋으면 몸매가 좋다고 본다. 

재밌는 것은 이 비례는 누가 가르쳐줘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태어나면서 자동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능력이다. 게임으로 치면 패시브 같은 것. 그냥 1 더하기 1이 2다는 정답을 마주했을 때 당연하다고 드는 생각과 같다.


물론 저마다의 아름다움은 있다. 사람마다 느끼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순수하게 시각적 정보만 놓고 본 것은 아니고 사람이면 성격과 인성과 같은 부분, 물건이면 쓰임이나 기능 같은 부분이 작용하여 종합적으로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매력과 아름다움은 다르다. 아름다움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시각적 정보에 의해 판가름이 난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은 안정된 비례감을 가지고 있다. 어딘가 비례가 튀거나 맞지가 않는다면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내가 어떤 것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 해서 결단코 그것을 차별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나에게 아름답지 못할 뿐 다른 누군가에겐 세상 아름다워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이다.

마찬가지로 1+1=2를 창문, 2+2=4를 덧니라 해서 오답처리를 받았다고 수학이 그들을 차별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비록 수학적 원리로는 그것이 틀렸다 해도 문학이나 미술시간에는 참신하고 창의적인 대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넷플릭스 시리즈 위쳐에서 망가져버린 캐릭터들을 보고 어쩌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는지 모르겠지만 최근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차별을 앞세운 역차별이 너무 지나치게 눈에 띄는 모습이 나에게 불편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차별을 앞세워 모든 카테고리에서 정해진 규칙과 질서를 부숴버리고자 하는 모습은 용납이 안된다. 


내가 속한 건축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세계적으로 인정하고 납득하는 공간의 멋과 철학은 따로 있는데 귀 닫고 눈감고 자기만의 멋에 취한 것으로 모자라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내 것이 전부라고 우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최근에 발표한 프리츠커상이 일본 건축가에게 돌아간 이후 이러한 현상은 더욱더 심해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는 언젠가 또 다뤄볼 예정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정해진 규칙과 질서가 있는 곳에서 말도 안 되는 기준을 들이밀며 차별당한다고 우기기 좀 말아라.

근본적으로 모두가 평등하지만 다름을 온전히 받아들이자. 나와 생각과 기준이 다른 세계와 분야에서 그 다름으로 인한 사람들의 시선과 불편함을 느꼈다면 그것은 현재 내가 속해있는 '다른 곳'에서 경험하는 시각의 차이일 뿐이지 '차별'이 아니다. 나를 차별하지 말라며 모두가 나와 같은 시각을 가져야 한다며 우기는 것만큼 졸렬해 보이는 것도 없다. 말이 좀 거칠었는가?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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