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발하는 은둔고수
병원설계를 한다는 핑계로 습관적으로 보게 된 시리즈가 있으니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다.
메디컬 드라마니 환자와 의사 사이의 에피소드가 주를 이루지만 주로 의사들의 사랑이야기가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대학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는 5인방 이익준, 채송화, 김준익, 안정원, 양석형 이들은 대학시절부터 독특하기로 유명했다. 그도 그럴게 밴드그룹을 결성했지만 사람들은 개그 동아리인 줄 알았다 하며 이들의 일상에서 나오는 재밌는 에피소드들은 그야말로 전설. 필드에 나가서도 각자의 매력을 살려 그들을 따르는 전공의, 인턴들이 항상 많이 있다.
안정원을 보고 첫눈에 뿅 간 장겨울, 곰 같지만 섬세한 매력에 점점 빠져드는 추민하, 김준완을 정말로 존경하고 모든 스케줄을 꿰차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를 더 알고 싶어 하는 도재학, 채송화에 반한 안치홍.
자기들이 각자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을 알기 위해 찾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봉광현.
이름을 보고 응? 누구? 할 수 있지만 응급의학과 조교수라고 하면 "아~!!"하고 알 수도 있을 것이다.
99학번의 5인방의 거의 모든 에피소드를 다 알고 있고 최근의 소식부터 같은 시기를 보내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그들의 과거사, 성격,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취미, 특기 웬만한 건 다 알고 있어 이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모이게 됐고 심지어 작은 소모임까지 만들어졌다.
앞서 언급한 주인공 5명은 서로 친하지만 각자의 성격과 개성을 표출하는 데 있어 절대 물러섬이 없다. 그래서 개성 강한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는 경우가 많다.
봉광현은 타협하기 어려운 이들을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어쩜 등장인물뿐만 아니라 시청자와의 연결고리 또한 제공한다.
그가 있는 응급실 또한 이러한 그의 성격을 잘 반영한다.
3차 병원 응급실이 어디인가? 온갖 사선을 넘나드는 환자들이 드나들며 여기서 적절한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각 분야의 탁월한 선생님이 있어도 그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파다한 곳이다.
따라서 응급실은 생사의 갈림길에 선 환자들이 제일 처음 마주하는 장소이며 여기를 중심으로 각 분야의 전문 선생님에게 환자들과의 연결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거의 모든 분야에 어느 정도 통달한 지식을 갖추어야 하기에 혹독한 자기 수련은 덤이었을 것이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지만 주위의 관심은 싸늘한 과. 내 눈엔 응급의학과가 그러한 어려움과 서러움을 잘 반영하고 있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주인공 5인방은 그야말로 눈이 부시게 빛나는 캐릭터다. 탁월한 능력, 훌륭한 성품, 빵빵한 집안까지 정말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이라 많은 사람들의 이목과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하다. 한마디로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다.
그러나 이 스포트라이트가 단순한 빛이 아닐 수 있던 이유는 이 빛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빛의 특성을 사람들에게 잘 알려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참 기분이 좋았던 부분은 이 주인공 5인방은 자신들이 빛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응급의학과의 적절한 조치가 있었기 때문에 수술이 잘 이루어질 수 있었다며 공로를 돌리며 감사를 표한 것이다. 이런 주인공을 보며 참 모든 연출진들이 주인공들을 정말 작정하고 멋진 캐릭터로 만들었구나 싶었다. 그리고 이러한 스포트라이트와 같은 강렬한 주인공들이 진심으로 인정하는 봉선생이야 말로 뭔가 초야의 은둔고수처럼 보였던 건 결코 지나친 생각은 아니었으리라.
강렬하진 않지만 한결같이 같은 밝기로 병원을 비추고 있는 응급실의 봉선생. 우리가 사는 세상엔 봉선생 같은 분들이 참 많은 걸 알 수 있다.
왜냐면 갖은 어려움과 시련이 있고 갖은 편법으로 남을 속여먹으며 돈을 버는 사람이 있어도 세상은 변함없이 굴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리에서 조용히 빛을 내며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공로가 인정받는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 어제보다 조금씩 더 나아지는 자신의 실력과 결과에 관심을 가질 뿐이다. 이 사람들은 결코 모자라거나 바보가 아니라 속는 것이 아니라 속아 주는 것이며, 위기의 순간에 진정한 능력을 발휘하는 히어로에 가깝다.
우리가 사는 공간을 다루는 건축가로서 나도 봉선생과 같은 은둔고수를 꿈꾼다. 온갖 비리가 이루어지는 설계판에서도 꿋꿋하게 초연한 마음으로 주어진 길에 정진하고자 각오를 다진다. 쉽게 익히고 빠르게 돈을 버는 여느 직업과 달리 오랜 시간 혹독하게 수련을 쌓아야만 하는 지루한 직업이다. 그러나 세간의 관심을 가지며 떠오르기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그 자리에서 쨍하진 않지만 은은하게 그러나 변함없이 세상을 섬기는 그러한 건축을 세상에 남길 수만 있다면, 또한 그런 건축가가 될 수 있다면, 아..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