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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은 May 14. 2022

드라이브 마이 카

 드디어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를 봤다. 부국제서부터 난리였다. 우연과 상상 모든 회차는 오픈하자마자 매진이었고 화상gv가 있던 서독제는 진짜 피터졌다. 개봉이 확실해서 영화제 피켓팅엔 참여하지 않았다. 

우선 러닝타임이 부담스러웠다. 179분. 

 약 5시간 반짜리 해피 아워를 꼭 극장에서 봐야지. 왜냐하면 집에서는 보다 포기할 게 뻔하니깐. 이라고 생각했는데 해피아워도 안 볼란다.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니 마음이 변했다. 3시간짜리 러닝타임도 힘들어죽겠다. 해피아워는 중간에 쉬는 시간도 준다지만 이게 무슨 미드나잇 상영도 아니고.....미드나잇도 똑같은 영화를 6시간동안 틀지 않는다...기본적으로 3개를 틀고 중간에 쉬는시간도 주고 간식도 준다고...(적고보니 사육 같다..하나의 호흡을 긴 시간동안 가져가는 게 참 힘들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정적인 영화라 더한 집중력을 요했다. 잠깐 멍때리면 장면이 지나간다. 그렇게 놓친 장면들이 많다. 요즘 잡생각이 많아 다른 생각도 하고, 영화의 지나간 장면을 생각하느라 눈 앞에 있는 장면을 놓치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 쓸 감상평은 영화를 제대로 본 사람이라면 이상하게 느낄 수도 있다. 영화를 제대로 곱씹으며 얘기하려면 한 번은 더 봐야 할 것 같은데 무리다. 힘들다. 이미 한 번 본 것만으로도 온몸의 기가 다 빨린다. 집에서 혼자 봤으면 중도하차했을 확률이 높다. 일단 생각 나는 것들을 적어 본다. 

 영화가 담아내는 장면은 억지스러울정도로 정적이고 완벽하다. 음악이 많이 사용되지 않아 더 고요하다. 도로가 나올 때도 좌우대칭이 완벽하고, 달리는 차 안에서도 흔들림이 없다. 프레임 안의 사물, 인물들은 분명히 움직이고 있는데 움직이는 것 같지 않다. 마치 장난감 마을의 병정들이 움직이는 것 같다. 난 그들을 바라보는 이방인이고. 주인공이 움직이는 차 안에 있을 때의 시간, 날씨는 모두 완벽하다. 햇빛이 쨍쨍한 화창한 날씨에다 파도조차 늘 일정하다. 크게 일렁이지도 않고, 적절한 물결이 넘실거리는 그야말로 이질적인 환상의 나라같은 느낌을 선사한다. 

 이는 모두 현재 주인공의 삶이 인위적인 연극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기에 자연스러울 수 없고, 이상할 정도로 완벽한 자신만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차 안에서 연극의 대사를 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건 대사가 아니라 독백에 가깝다. 자신의 호흡에 맞춰 상대방의 음성이 나오는 것은 혼잣말이다. 상대의 감정,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말만 해대는 꼴이 아닌가. 상대가 할 말은 늘 정해져 있고, 주인공이 할 말도 늘 정해져 있다. 변수없이 일관적인 세계. 어떤 타인도 없는 세계. "드라이브 마이 카"의 세계는 그렇게 표면의 완벽함을 유지한다. 이토록 위태롭고 작은 세계에도 변화가 시작되는데, 바로 운전수의 등장이다. 즉, 세계에 타인이 생긴 것이다. 운전수는 늘 주인공의 독백을 듣는다. 독백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 독백을 듣는 관객이 생긴 셈이다. 혼자였기에 완벽하다 여겨졌던 세계에 관객이 개입하며 주인공의 세계는 변화를 마주하게 된다. 

 연극 연출인 주인공은 배우들에게 감정을 빼고 로봇처럼 말할 것을 요구한다. 배우들은 일본어, 한국어, 수어, 영어 등 본인이 사용하는 언어로 연기하기에 상대역이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른다. 마치 차 안에서 자신의 호흡에 맞춘 카세트와 말을 하는 주인공처럼. 주인공은 카세트가 무슨 말을 할 지 알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이다. 

 주인공의 죽은 부인과 불륜을 저질렀던 젊은 남자 배우는 어느 날 술을 먹고 주인공과 함께 차를 탄다. 이 부분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무튼 아내와 관련된 말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아내와 연관된 말을 하는 그는 주인공이 대본 리딩때 요구했던 것처럼 로봇처럼 말한다. 표정 변화도 거의 없고, 말하는 어조도 일정하다. 시시각각으로 표정이 변하는 주인공과는 상반된 모습이다. 로봇처럼 말하던 배우도 점차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감정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배우가 내린 후에는 운전수와 주인공이 담배를 피는데, 그것을 포착하는 카메라는 흔들리고 있다. 이제껏 완벽하고, 흔들림없이 장면을 잡아냈던 것과는 다르게. 흔들림을 통해 주인공이 감정에 직면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남자 배우는 폭력 사건으로 인해 연극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 주인공이 매일 차에서 내뱉는 대사는 그 배우가 맡았던 역할이다. 사람들은 주인공이 대신 그 역할을 연기할 것을 권하지만, 주인공은 그닥 반기지 않는 눈치이다. 조금 더 생각해보겠다고 한 후 운전수와 함께 운전수의 고향으로 향한다. 고향으로 가는 길을 진실하다. 차의 흔들림이 포착되기도 하고, 가는 길에 천둥도 치고 비도 내린다. 날씨가 언제나 맑을 수만은 없는 법이니. 그들이 고향을 향해 달리던 도중, 갑자기 영화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다. 자동차 소리도, 바람 소리도, 모두 사라진 채 극장에 정적만이 맴돈다. 다른 시공간에 관객을 위치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그 후에 나온 설원은 그 곳이 더욱 환상적인 듯한 느낌을 고양시킨다. 그리고 가장 이질적이고, 환상적으로 보이는 곳에서 운전수와 주인공은 진실된 감정을 마주한다. 죽은 사람을 실컷 미워하고 사랑할 것을 다짐하며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진다. 

 돌아온 주인공은 연극에서 남자 배우의 역할을 맡는다. 연극이 상영되는 모습에서 배우들이 각자의 언어를 사용한 이유를 짐작해보았다. 자신이 가장 솔직할 수 있는 언어이기 때문인 게 아닐까. 가장 편하고, 그렇기에 가장 솔직할 수 있는 언어로. 혼자만의 세계에서 고립되었던 주인공은 연극에서 타인의 언어를 듣고, 자신의 언어를 말한다. 주인공은 고립된 세계에서 나오는 것이 두려워 연기를 거절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에 진실할 것을 다짐한 주인공은 연기를 할 수 있다. 무대에서 누구보다도 진실된 언어를 듣고 말하며 마음껏 사랑하고 증오할 자유를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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