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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춤 Sep 03. 2021

멈추지 않는 마음으로

서른셋, 안면마비 #3

8월은 쇠락하는 달이다. 뜨거운 힘이 절정으로 치닫다 언제 그랬냐는 듯 하루새 푹 꺾이는 달. 그 변화의 순간을 포착한 적은 더러 있었지만 그 형태가 쇠락임을 알아차린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지겨운 더위가 비로소 물러가고 선선한 바람이 찾아왔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더위의 입장에서 보면 모처럼 존재감을 뽐내며 한껏 자의식에 차오르다 한순간 그 힘을 잃은 셈. 달아오르던 나의 8월 역시 열렬히 치솟다 순식간에 고꾸라졌다.


작년 말 병가로 짧은 휴직에 들어가 종이로 된 노트를 다시 마련한 이후 처음으로 이달에는 단 하루의 일과도 적지 못했다. 종이노트를 펼친 빈도와 쓰인 메모의 길이를 통해 그날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는데, 어떤 것도 기록되지 않은 8월의 노트는 쫓기듯 살아내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얕았거나 일상보다 더 큰 관념에 잠길 만큼 깊었던 시간을 말해준다.


떨었던 긴 겨울을 지나 새로운 시작의 씨앗을 품고 힘차게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열망으로 달려온 시간이 끝에 이르렀다. 더위가 절정을 향해가는 동안 희망은 팽창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너무 많이 눌러써 종이를 헐게 만든 이 일곱 글자는 시간이 지나도 닳지 않는다. 마침내 교수님의 입에서 "남자분이니 이만하면 그냥 사세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더 이상 병원을 자주 드나들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과 앞으로 삶을 진실 마주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동시에 느꼈다. 어떤 일을 겪은 후에 아무 일 없었던 듯 살 수는 없다. 그것은 거짓이니까. 이미 끝난 일이라고 말하기엔 거울 속 내 표정은 여전히 한쪽으로만 작동한다. 이제부터 나는 이 얼굴을 가지고 내게 주어진 시간을 보내야 한다. 잠깐의 환희가 지나간 자리에 무거운 좌절이 드리워 나를 짓눌렀다.


찌그러진 얼굴로 10개월을 살아내는 동안 많은 사건과 그보다 더 많은 생각이 있었지만 나는 결국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느 때보다 강렬한 자유의지를 가지겠노라 다짐한 뒤에도 나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전기 작용만으로는 서있는 물리 공간을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은, 익숙할수록 그것에 머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며 변화를 꿈꾼다면 반드시 입고 있던 옷을 내던져야 한다는 세상의 이치를 더욱 선명히 드러낼 뿐이었다.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고 싶었으나 맨 몸으로 야생에 뛰어들기엔 연약했고 무엇보다 내 삶은 온전한 나의 것이 아니었다.


극도로 뜨거운 것을 만진 찰나에 칼로 베인 듯한 차가움을 느낀 적이 있다. 여름의 끝, 오랜 시간에 걸쳐 충분히 뜨거워졌을 때 나는 나 이외의 다른 세계를 찾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에게 내가 믿는 삶의 방식에 대해 말할 때마다 점점 그들에게서 멀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낯설어졌고 많이 말할수록 외로워졌다. 외로울수록 나를 의심하게 되었다. 어느 순간 보니 가장 낯선 사람은 나였다. 갑자기 텅 비어 버렸다.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어 일순간 추위에 떨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초연하기로 했고 실제로 그렇게 믿었고 잘 살기로 다짐했다. 다만 이전과는 다른 방식이어야 했고 그래서 차근히 준비도 했다. 하지만 막상 박차고 나서야 하는 순간이 되었을 때 거꾸로 주저앉게 되다니. 어떻게 살 것인가. 평범하게 사는 것도 어렵지만 평범하다고 믿는 사람들과 사는 것은 더 어렵다. 얻은 것을 버리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지. 너는 정말로 더욱 이기적일 필요가 있다는 주위 사람들의 조언은 오히려 족쇄가 된다. 잔잔히 퍼지는 선의만을 믿고 통제권을 내려놓는 삶의 방식은 부자연스럽다는 말은 나에 대한 믿음과 오래 다듬어온 가치관을 통째로 흔들어 놓는다. 다름 아닌 나라는 사람이라 이런 병에 걸렸고, 그래서 안쓰럽고 때론 멍청한 그 태도에 화가 난다며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단지 그 말 뿐일 것이다. 내가 주는 것에 금방 그들은 적응하고 당연해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들의 기준에서 좋은 점은 남겨두어야 한다면. 결국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도 내가 진정으로 변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조르바라면 어떻게 했을까, 니체라면, 페소아라면.


매년 계절이 깊어질 때면 반대의 계절을 그리워했다.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고 즐기기보다는 늘 밀어내고 새로운 것을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 여름의 쇠락을 겪고 나니 겨울이 오는 것이 벌써 두려워진다. 무언가를 두려워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사소한 통증도 큰 병이 생긴 것 같이 느껴진다. 그 사소한 통증이 너무 잦아졌다. 사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너무 고민하지 않으며 사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옷을 챙겨 입고 나가서 한바탕 달리기 하는 것도 괜찮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역시 아무 일 없었던 듯 살 수는 없다. 나는 활짝 웃을 수 없고, 매일 거울을 본다.


어떻게 살 것인가. 지금부터는 또다시 시작해야 한다. 격렬한 신경세포의 운동으로 발생한 열이 흩어져 다시 평형이다. 처음 안면마비에 걸렸을 때부터 오늘까지, 나에게 남은 생이 어쩌면 5년도 안될 수 있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럴수록 힘내어 새로운 것을 찾고 오늘을 즐길 줄 알았는데 남은 것은 이 글뿐이다. 여전히 먼지 같은 단어들이 둥둥 떠다니다 마음 한 켠으로 내려와 자리 잡고 나를 괴롭힌다.


그리하여 내 긴 고민의 결론은 이러하다. 오히려 천년만년 살 것처럼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 아픈 것도 안 아픈 것처럼, 괴로워도 금방 지나갈 것처럼. 더 솔직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려 하지 말고, 한가득 포장해 예쁘게 바라보면서. 자꾸 비우려 하지 말고 앞으로는 채우려 노력하면서 그렇게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 한 줌의 희망이 수백의 절망보다 낫다는 믿음 아래 멈추지 않는 마음으로 다시. 그러다 보면 많은 시간이 지나 문득 거울 속의 내가 활짝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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