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춤 Dec 04. 2021

이름 짓기 놀이

느린 음악에 막춤 추기 #2

좀처럼 잠을 설치지 않는데 지난주 유럽 출장을 다녀온 이후 몸이 시차 적응을 하는지 오늘은 잠든 지 두 시간 만에 깨어서 새벽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몇 시간 후면 테니스를 치러 나가야 하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잠이 들지 않아 그냥 깨어 있기로 했어요. 아예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환한 어둠 속에서 그동안 못했던 깊은 생각들을 실컷 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한 두어 시간 마음껏 달리다 보니 흘려버리기 아까운 생각들이 많아 결국 노트를 펼 수밖에 없었네요. 내가 이렇게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었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떠도는 편린들 가운데 한 가지를 골라 글로 남겨볼까 싶어요. 테니스를 치러 가려면 아직 두 시간이 더 남아서, 조금 길게 말할게요. 저는 단어 애호가예요. 예전에는 내가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을 아주 공공연하게 말하기는 어려웠어요. 전문가와 애호가를 혼동했기 때문이죠.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려면 잘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특히 너무 유명해서 오히려 그것을 말하기에 겉멋이 든 것처럼 보이거나 젠 체 하는 느낌을 주는 대상을 쉽게 말하지 못했어요. 저는 그런데 어느 분야에서든 제 취향이 있는 편이거든요. 이미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만 좋아하는 주제이니 또 말해볼게요. 예를 들어 미술가에 관해 얘기하자면, 저는 마그리트와 에셔를 좋아하고 프리드리히의 그림도 좋아합니다. 가끔 에곤 실레나 훈데르트바서, 베르메르의 그림에 큰 감명을 받기도 했지만 거기까지 얘기하게 되면 대화가 너무 길어지죠. 하지만 누군가 저에게 마그리트의 어떤 그림을 보여주면서 이 그림의 제목이 뭔지, 언제 그려졌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물어본다면 저는 대답을 못할 것 같아요. 에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저는 벨기에의 마그리트 미술관과 네덜란드에 있는 에셔 미술관을 일부러 찾아 다녀왔고 그림을 충분히 음미하면서 큰 즐거움을 맛보았어요. 밥은 굶던 시절이었지만 엽서는 왕창 사왔습니다. 그러니 좋아한다는 것이 거짓은 아니에요. 전문가는 아니지만 애호가라고 할 수 있죠.


이번엔 글을 쓰는 작가를 예로 들어볼게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보르헤스와 페소아, 그리고 장르소설가라 할 수 있는 김용과 존 르 카레의 팬이죠. 오르한 파묵,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글을 보고 가끔 황홀감을 느낄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첫 손에 꼽는 작가인 보르헤스와 페소아의 모든 작품을 읽어보지 못했고 심지어 대표작의 줄거리 조차 기억하지 못합니다. 단지 그들이 주는 문학적 영감과 그들이 쌓아 올린 글의 세계를 좋아하는 것이죠. 하지만 제가 보르헤스를 좋아한다고 누군가에게 말하는 순간 저는 그의 작품 이름을 하나씩 대면서 줄거리를 얘기해야 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정작 몇 권 읽지도 않았는데 제대로 기억하는 작품은 하나도 없고 다 날아가버렸습니다. 인터넷 공간에서는 특히 전국의 지식인들이 총출동합니다. 그들 사이에서 제가 애호가 행세를 하려니 뭔가 민망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페소아의 흔적을 찾아보겠다며 리스본 제로니모스 수도원에 있는 관을 보러 간 적도 있고, 이스탄불에 있는 오르한 파묵의 '순수 박물관'을 찾아간 적도 있거든요. 나름대로 성지순례한 셈입니다.


즘 특히나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나라는 존재는 세상에 유일무이한데, 끊임없이 나 자신을 상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요. 쉽게 말하면 눈치 보며 산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관조하며 자기 자신을 대상화하면 결국 죽을 때까지 스스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살아갈 수는 없기에 어느 정도의 상대성은 필연적이겠죠. 그러나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한다고 말할 때조차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증명해야 할 것 같은 강박이 든다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사실 좋아하는데 이유가 어딨겠습니까. 그냥 좋아하는 것이죠. 상대와 객관이라는 말속에는 언제나 타자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좋아한다는 감정은 순수한 개인의 것입니다. 네, 맞아요, 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에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저는 단어 수집가이자 애호가입니다. 일전에 브런치에 글을 쓰기도 했지만 저는 이름 짓기를 참 좋아해요. 혹시 이 글을 보는 누군가가 당신보다 내가 더 이름 짓는 것을 더 좋아해 나는 수첩이나 책상, 밥통에도 이름을 붙이거든. 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아 그러세요? 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저는 단어 전문가는 아닙니다. 오늘 새벽 혼자 놀기의 주제 가운데 한 가지는 앞으로 자녀를 갖게 된다면 어떤 이름을 붙여줄 건가 하는 것이었어요. 자주 하는 생각이죠. 아마 예전 글에서는 산, 슬 두 이름을 언급했던 것 같은데요. 저의 성은 이 씨이고, 자식 대에는 돌림자로 신하 신(臣) 자를 쓰게 되어 있지만 쓰지 않을 생각이에요. 만일 멋진 돌림자였다면 쓸 수도 있겠지만, 신하는 아무래도 조금 그렇습니다. 예전부터 외자 이름이 이쁘다고 생각했는데 이 씨 성에 외자 이름을 붙이면 놀림감이 되기 쉬워 다소 아쉽습니다. 사실 이 씨는 글자의 형태로 봤을 때도 균형이 잡혀있지 않아서 외자는 어울리지는 않는 것 같고요.


좋아하는 낱말 가운데 소요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한가로이 거닌다는 뜻인데 중국 도가 사상을 공부하면서 알게 된 말입니다. (김용의 무협소설 천룡팔부를 보면 소요파라는 문파가 등장하는데, 작중 행적은 소요와는 거리가 제법 있습니다. 소요파에서 따온 이미지는 아닙니다.) 브런치에 처음 글을 쓰면서 필명으로 이춤을 써야겠다고 결심하기 전에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두 단어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이 '소요'입니다. 소요라는 글자에는 뭐랄까, 풍경이 있어요. 예전에 고등학교 윤리 과목 선생님께서 본인이 생각하는 가장 멋진 호(號)로 황희 정승의 '방촌(厖村)'을 꼽은 적이 있습니다. 역시 그 시절에도 저는 단어 애호가였지만 단어의 리듬을 중시했기에 '방촌' 은 너무나 촌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은 '방촌'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눈앞에 온기 넘치는 시골 풍경이 펼쳐진다며, 풍경이 보이는 이름이 훌륭한 이름이라고 말씀하셨죠. 그전까지 저는 꽃 화(花)라든지 맑을 소(昭)라든지 읽었을 때 드는 느낌이 아름다우면서 좋은 뜻을 갖고 있는 한자어들을 좋아했는데, 그 말을 들은 이후에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우습지만 사소한 고백을 하자면, 중학교 때 제가 스스로에게 붙인 호는 백겸(白謙)이었습니다. 그럴듯한 한자어 싸인까지 만들었죠. 지금 다시 보니 당돌했구나 싶습니다. 얼마나 자의식이 넘쳤으면 겸손하라고 스스로 이름을 붙였을까요. (자꾸 옆길로 새는데, 이런 것이야 말로 보르헤스적인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요라는 말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또 다른 단어는 '고요'입니다. 고요. 너무 좋지 않나요? 낱말의 형태는 안정감 있으면서도 넘치는 것 없이 단순하고, 입으로 소리 내었을 때는 차분하지만 차갑지 않습니다. 단어에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는 듯한 인상도 듭니다. 그 뜻은 또 얼마나 좋은가요. 소란이 가득한 세상 속의 리듬에 흔들리지 않는 편안한 모습. 물론 저만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정말 멋진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녀들의 이름으로 써도 괜찮을지는 약간 고민이 됩니다. 이 씨 성에 고요와 소요를 붙이면 어딘지 모르게 한국적인 정서가 느껴지지가 않거든요. 이런 이름을 쓰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일 수도 있고요. 남자와 여자 이름으로 모두 약간은 어색하기도 합니다. 영어 이름으로 썼을 때는 꽤나 특색 있고 좋을 것 같지만요. 비슷한 이름 중에 제 아내가 앞으로 반려견을 키우게 되면 지어주려는 '소로'라는 단어도 있는데요. 이 이름은 스페인의 화가 호아킨 소로야에서 따왔습니다. 강아지에게 소로야~ 하고 불러주려는 것이죠. 부르기 좋은 이름입니다. 그렇지만 '이소로'가 되는 순간 느낌이 사라집니다. 제 아내의 성을 따라볼까요. 박고요, 박소요, 박소로. 음, 좋은 단어가 좋은 이름이 되기는 어렵네요.


오늘 밤에 이 주제를 떠올리지 않았다면 아마 한동안 자녀 이름 짓기 놀이를 즐길 수 있었을 텐데, 글을 쓰면서 보니 너무 만지작 거려 식상해진 장난감을 손에 쥔 느낌입니다. 산, 솔, 소요, 고요, 소로. 모두 너무 오래 가지고 놀았을까요. 귀여운 꼬마 아이에는 어울리지만 서른 살에도 그 이름이 어울릴지는 글쎄, 갸우뚱합니다. 한 가지 이름이 더 남아있기는 합니다. '정원'인데요. 화려하지 않고 중성적인 느낌이라 좋아합니다. 단어의 균형도 알맞고요. 이 씨 성이랑도 제법 어울립니다. 영어 이름은 별 수 없이 'Garden' 이겠죠. 전에도 좋은 이름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지난달 멕시코 출장 중에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의 입구에 스페인어로 'Jardin'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고 난 이후로는 점수가 더 올라갔습니다. 다만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친한 여자사람친구의 이름과 똑같아서 아내에게 괜한 오해를 부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아무튼 단어 애호가로서 탐나는 이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일필휘지로 글 쓰다 보니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났네요. 곧 나갈 준비를 해야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슬슬 잠이 옵니다. 물론 두 시간 전에 이미 지금의 이 상황을 예견했지만 막상 닥치니 자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그래도 모처럼 앉은자리에서 글 하나를 끝까지 써서 뿌듯합니다. 브런치에서 계속 며칠 째 글이 없다며 알람을 보냈거든요. 사실 이런 식으로 존댓말로 글을 써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제 글의 독자는 언제나 제 자신이었고, 누군가에게 내보이는 글을 쓸 때 조차도 가장 중요한 독자는 저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누군가에게 말하듯 글을 써보니 오히려 자기 검열을 하지 않게 되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네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에게 부여한 어떤 기준이 사라진 느낌입니다. 가끔은 틀을 벗어나는 것도 괜찮군요.

매거진의 이전글 아무런 내용이 없는 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